1 일단 주는 대로 먹겠다고 결심한 이상 셰프를 100% 믿어라. 믿음과 기대도 더할 나위 없는 반찬이 된다. 2 주는 대로 먹는 레스토랑이 오히려 고객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맞춰준다. 육류를 좋아하고,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미리 전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가도 한사람을 위한 음식을 따로 준비해준다. 3 셰프가 소믈리에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음식과 딱 어울릴 만한 와인을 쭉 꿰고 있다. 4 예약은 필수. 주말의 경우 열흘 전에 예약하는 것이 안전하다. 5 예약을 취소·변경할 때는 미리 알려주는 MH가이다운 매너를 보여주길.
그는 묻고 나는 답했다. 드레싱부터 수프, 사이드 디시, 버터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고른 식사는 딱 내가 원하는 대로였지만 마음이 어째 싱거웠다. 내일도 오늘처럼 뻔할 것 같았다. 이 싱거움을, 보이는 자리에 가 앉으면 묻지도 않고 머릿수대로 밥과 찬을 내주는 곳에서 “오늘은 제육이 아니라 고등어네!” 하고 반색하는 것으로 달래고 싶었다. 솜씨 좋은 백반집처럼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알아서 식탁을 차려주는 레스토랑이 있다. 내가 선택한 많은 음식을 두고, 그곳을 그리워했다.
갑자기 출현한 레스토랑의 새로운 경향이 아니다. 정해진 메뉴 없이 그때그때 알아서 음식을 내주는 레스토랑들 가운데 아따블르a Tables나 라미띠에L'amitie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인기를 끌어온 곳이다. 삼청동 자락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조용히 밥을 차려주며 블로거들의 사랑을 받은 아따블르. 정통 프랑스 음식을 아끼는 사람들이 알음알음으로 찾아가는 라미띠에. 그리고 작년 리스토란테 에오Ristorante EO와 테이스티 블루바드Tasty BLVD가 메뉴판 없는 레스토랑 행렬에 동참했다. 칠판에 쓱쓱 적거나 간단한 프린트, 셰프가 직접 오늘 나올 음식을 설명하는 등으로 메뉴판을 대신하는 ‘오늘의 메뉴’는 셰프가 직접 매일 새벽 장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정해진다. 제철 재료를 비롯한 그날의 가장 좋은 재료가 오일을 입고 오븐에 들어간다. 이들 레스토랑의 가장 큰 장점이 여기에 있다. 제철 재료만큼 영양 풍부하고 맛있는 게 또 어디 있나? 대신 상황이 이렇다보니 낼모레 먹을 저녁도, 막상 가서 무슨 음식을 먹게 될지는 ‘뚜껑’ 열고 포크 들어봐야 알게 된다. 궁금한 마음에 메뉴를 물어봐도 “글쎄요, 이제 다금바리가 맛을 내기 시작하네요”라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만 돌아오기 일쑤다. 궁금증만 허기만큼 쌓인다.
왜 이런 방식으로 운영할까? “지금 규모에서 손님을 가장 잘 대접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요리도 선보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봤습니다.” 리스토란테 에오를 이끄는 어윤권 셰프의 말이다. 이들 레스토랑의 규모는 대부분 작다. 많은 메뉴를 갖추면 재료 부담이 크기에 단품 요리를 없애는 대신, 셰프의 재능을 믿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밥상’을 선물하겠다는 각오다. 다양한 단품 요리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셰프 스페셜 코스’를 내는 테이스티 블루바드 최현석 셰프는 자신의 역량을 펼치기에 메뉴판이 너무 좁다고 말한다. “그때그때 구성하는 스페셜 코스는 셰프로서의 포부를 선보이는 창구입니다. 믿고 선택해 준 분들이기에 새로운 시도와 진귀한 재료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고 보면 ‘주는 대로’ 먹는 레스토랑은 재능 있는 셰프와 음식을 즐기는 고객과의 행복한 동거다. 셰프는 자신의 역량을 막힘없이 선보이고, 고객은 의외성과 함께 셰프의 솜씨를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이 레스토랑들이 맛뿐 아니라 최근 가장 ‘잘나가는’ 곳이 된 이유는 음식의 엔터테인먼트 측면까지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음식의 속성이 변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음식이 그 자체를 즐기는 오락이 되었다. 식도락이 가장 트렌디한 여가 생활이 된 지금, 무엇을 먹게 될지 모르고 찾아가는 레스토랑은 그 자체가 스릴 넘치는 이벤트가 될 수 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거나, 매일 똑같은 음식이 식상할 때. 혹은 의외의 저녁으로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을 때, 이 레스토랑들을 선택하라. 단, 셰프에 대한 무한 신뢰를 가져가라. 맛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정해진 메뉴가 없는 레스토랑은 그만큼 셰프의 내공과 패기, 모험심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 자신을 믿고, ‘백지 메뉴판’을 맡긴 손님들에게 셰프들은 늘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든 최고의 솜씨를 부리기 때문이다.
‘주는 대로’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 리스토란테 에오 그녀에게 멋지게 보이자 셰프, 셰프의 아내, 처남이 운영하는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테이블이 4개에 불과해 예약이 필수다. 따뜻하고 로맨틱한 곳. 가격을 고려해도 훌륭한 런치코스는 양껏 먹는 MH가이에게는 아쉽게 느껴질지도. 예산 점심 3만3천원, 저녁 6만6천, 8만8천원. 위치 청담동 청담초교 부근 02-3445-1926.
테이스티 블루바드 남자들끼리 모처럼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고, 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 ‘셰프 스페셜 코스’가 있다. 장안에서 스테이크로 소문난 레스토랑이면서도, 의욕적으로 개발하는 창작 요리가 발군이다. 예산 파스타 2만원대, 점심 3만5천원, 셰프 스페셜코스 12만원(세금 별도). 위치 압구정동 LG패션 골목 02-6080-3332.
아따블르 부모님에게도 한턱 내 오래전부터 입소문을 통해 알려진 실력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정겹고 편안하다. 예산 저녁코스 4만5천원(세금 별도). 위치 삼청동 02-736-1048.
라미띠에 투자할 줄 아는 미식가 변변한 간판도 없지만 음식에 대한 자부심만은 강하다. 정통 프랑스 음식을 내는 몇 되지 않는 레스토랑이다. 저녁에만 열고, 테이블은 4개뿐이다. 예약이 필수다. 예산 저녁코스 12만원(세금 별도). 위치 압구정동 씨네시티 골목 02-546-96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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