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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음악 칸쵸네~ 본문

음악,영화/샹송.칸초네.파두

이탈리아음악 칸쵸네~

dhgfykl; 2009. 7. 22. 20:11

    

 

 

 

 

칸초네는 13-17세기에 이루어진 이탈리아의 시의 한 형식인데, 18-19세기의 음악에서 서정적인 가곡 기악곡에 붙여진 명칭이기도 하다. .

 

전통적인 칸초네의 특징은 멜로디가 밝고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으며 내용도 단순하고 솔직하게 표현한 사랑의 노래가 많은 데 있다. 곡의 구성도 거의 2마디 ·4마디 ·8마디식의 배(倍)로 멜로디가 진행된다. 그리고 곡의 처음에는 스트로파라는 이야기부분이 있고, 리토르넬로라는 되풀이하는 부분이 있어 곡을 북돋아간다. 킨초네에는 예로부터 각지에 전해 내려온 향토색 짙은 민요나 일류 작곡가에 의한 격조 높은 가곡, 또 재즈의 영향을 받은 로크조(調)의 곡 등 많은 종류가 있다. 그 중에서도 나폴리민요로 알려져 있는 나폴리의 칸초네(칸초네 나폴레타나)는 독자적인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 변천이 심한 나폴리의 역사와 항구에서 이루어지는 동서문화의 교류를 반영하여 나폴레타나에는 동양적인 곡조와 애수를 띤 것들이 많고, 가사도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나폴리어로 되어 있다. 또한 18세기에 생겨난 밸칸토창법이 큰 영향을 끼쳤다.

 

나폴레타나를 육성한 것은 유명한 피에디그로타의 노래축제이다. 그것은 이 지방의 어부들이 제례(祭禮) 때에 노래를 바친 것이 그 시초인데, 18세기 초에 나폴리왕에 의해서 나폴리 전시의 음악제가 되어 《오 솔레 미오》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의 많은 명곡이 나왔다. 이 행사는 한때 중단되었다가 1953년부터 나폴리 칸초네페스티발(나폴리가요제)로서 부활되었다. 베네치아와 로마 등지도 칸초네가 발달하고 트렌토 등 알프스산록의 북부 도시에서는 알피니스트들의 코러스가 울려퍼진다. 로마의 칸초네(칸초네 로마나)는 명쾌한 곡조로 널리 애창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북서부의 산레모가 그 중심지로 바뀌었다. 1951년에 시작된 산레모가요제는 1958년에 최우수곡으로 뽑힌 《볼라레》가 세계적으로 히트함으로써 국제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 로크나 라틴리듬을 도입한 곡들도 내보내고 있다.

 

이탈리아 칸초네의 발전

이탈리아 대중음악의 자양분이 된 나폴리 민요는 ‘피에디그로타 페스티벌’을 통해 그 전통을 꾸준히 계승했다. 지방색이 강한 음악이지만 이탈리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 까닭에 1953년에는 ‘페스티벌 칸초네 나폴레타나’라는 이름으로 제1회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출품되는 작품들의 성향과 형식은 더욱 넓어졌고 다양한 감성을 지닌 현대적인 칸초네가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됐다.

이렇듯 나폴리를 중심으로 남부 전역에서 활성화되었던 칸초네는 세계 2차대전 이후, 신흥 경제·관광 도시로 떠오른 밀라노로 중심이동을 했다. 낙천적인 기질과 낭만적인 문화를 즐기는 이탈리아인들은 북부로 옮겨온 칸초네를 부흥시키기 위해 서북단에 위치한 해안도시 산레모에서 칸초네 축제를 기획하게 된다. 1951년 첫 대회를 개최한 산레모 가요제는 나폴리 음악의 전통을 잇는 축제이자 칸초네를 세계적인 음악으로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이탈리아 최고의 음악행사라 할 수 있다. 1958년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도메니코 모두뇨의 ‘볼라레’와 토니 달라라의 1957년작 ‘코메 프리마’는 칸초네뿐 아니라 산레모 가요제를 널리 알린 대표적인 곡이다.

지역적인 특색이 강한 칸초네가 세계적인 음악장르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1950년대 이후에 밀려든 팝음악과의 적절한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밝고 아름다운 선율과 직설적인 사랑의 표현,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간결한 구성이 주를 이룸으로써 자연적으로 대중적인 친화력을 얻게 된 것이다.

피노 단지오·밀바·지노 파올리·세르지오 엔드리코·지아니 모란디 등은 칸초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최고의 가수들이다. 특히 밀바(본명 마리아 일바 비올카티)는 ‘칸초네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빛나는 업적을 남긴 국제적인 감성의 소유자다. 이탈리아 국영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신인선발대회에서 7,60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으며 산레모 가요제에 참가하여 3위에 오르는 등 데뷔 시절부터 비범한 활동을 펼쳤다. 칸초네가 지닌 아름다운 서정을 다양한 형식의 음악과 결합시켜 세계인과 나눌 수 있는 공감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Marisa Sannia
칸초네와 민속 음악이 어우러지는 'Casa Bianca'의 스타 마리사 사니아의 앨범
-현대적 감각으로 담아낸 고향 사르데니아의 정서
음반 시장에서 미국세가 힘을 발휘하고 있는 요즘과 달리 지난 1960년대와 70년대는그야말로 다양한 음악이 사랑받았던 시대라 할 수 있다. 물론 1990년대 후반, '월드 뮤직'이라는 이름으로 제 3세계의 음악들이 잠깐 관심을 모은 적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 수요층은 일부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던 반면 60년대와 70년대 이 땅에서는 샹송이나 칸초네 등의 비영어권 음악들도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은 역시 프랑스의 샹송과 이탈리아의 칸초네였다. 아다모나 에디트 피아프, 자크 브렐, 이브 몽탕, 앙리코 마샤스 등의 샹송 가수와 니콜라 디 바리, 질리오라 친케티, 루치오 달라, 토니 달라라, 밀바, 도메니코 모두뇨 등 칸초네 가수들이 방송을 통해 널리 사랑받았다.
음반 시장에서 팝 음악에 비해 가요가 우위를 점하게 된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대중들이 노랫말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영어에 비해 더욱 생소할 수 밖에 없는 샹송이나 칸초네가 그토록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은 지금의 현실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리듬보다는 멜로디에 감상의 우선 순위를 두는 우리 취향에 들어맞는 아름다운 선율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샹송의 경우 가수들이 그 노랫말의 전달에 비중을 두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멜로디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고 칸초네 역시 이탈리아인들의 낙천적인 기질을 반영하듯, 대체로 밝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부르기 쉬워 우리 취향에 잘 들어맞는 음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히트한 샹송이나 칸초네 곡들이 지닌 아름다운 멜로디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는 일 아닐까...
이탈리아의 대중음악인 칸초네(Canzone)는 프랑스의 샹송(Chanson)이나 스페인의 칸시온(Cancion)과 마찬가지로 '노래'를 의미하는 말이다. 모두 그 나라의 대중적인 음악을 일컫는 용어로 쓰이고 있는데 그 안에는 포크라든가 록 음악 등 여러가지 종류의 음악이 포함되지만 그 나름의 특징은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칸초네의 경우 클래식 음악을 제외한 대중 음악을 일컫는데 대체로 쉬운 곡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멜로디로 주로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칸초네가 샹송이나 칸시온, 그리고 파두 등의 음악과 비교했을 때의 두드러진 특징은 상업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들 음악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이며 국가와 인종을 초월해 사랑받을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칸초네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산레모 페스티벌-우리나라에서는 '산레모 가요제'란 이름으로 불렸던-이다. 물론 관광 수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탈리아에는 수많은 칸초네 페스티벌이 존재했지만 1951년 시작된 산레모 페스티벌 만큼 역사와 권위, 또 대중적인 인기를 지니고 있는 행사는 찾기 힘들다. 역대 산레모 가요제에서 우승했거나 입상했던 가수들의 면면을 보면 그 명단 자체가 이탈리아 인기 가수들의 계보를 의미한다고 할 만큼 이 행사를 통해 등장한 가수들은 대중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빅 히트곡 'Volare'로 1958년 8회 대회에서 우승한 도메니코 모두뇨라든지 'Non Ho L'Eta(나이도 어린데)'로 1964년 14회 대회에서 우승한 질리오라 친케티 외에도 이바 자니키, 니콜라 디 바리 같은 추억의 스타들이 있고 1980년대 이후엔 요즘 젊은 음악 팬들도 잘 알고 있는 에로스 라마조띠나 라우라 파우지니 등의 스타들이 등장했었다.
1947년 지중해에서 시칠리아에 이어 두번째로 큰 사르데니아 섬의 상업도시 칼리아리의 이글레시아스에서 태어난 마리사 사니아 역시 산레모 페스티벌에서 입상하면서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마리사 사니아(Mrisa Sannia) 역시 산레모 페스티벌이 배출한 스타로 주목을 받았다. 물론 위에 열거한 칸초네 스타들에 비한다면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지만 돈 배키(Don Backy)의 원곡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던 'Casa Bianca(하얀 집)'을 불렀던 가수라고 한다면 고개를 끄덕일 올디스 팬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지중해에서 시칠리아에 이어 두번째로 큰 사르데니아 섬(Sardegna 혹은 Sardinia)의 최대 상업도시 칼리아리의 이글레시아스(Iglesias)에서 1947년에 태어난 마리사 사니아는 열아홉 때이던 1966년 이탈리아의 방송사인 RAI가 주최한 신인 발굴 페스티벌에서 우승하면서 음악계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뒤 TV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던 그녀는 1968년엔 돈 배키가 만든 화제의 곡 'Casa Bianca'로 주목을 받았고 그 해에 TV 페스티벌인 칸초니시마(Canzonissima)-1961년부터 시작된 행사로 매해 주제를 정해 행사를 열어서 주목을 받았다-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실력을 과시했다.
그 뒤 1970년과 1971년에도 산레모에서 'L'amore E Una Colomba(사랑은 비둘기)'와 'Come E Dolce La Sera'로 결선에 오르는 단골손님이 되었고 1984년에도 'Amore Amore(사랑, 사랑)'이란 곡으로 행사에 참가했었다.
1968년에 'Casa Bianca'와 'E Se Qualcuno Si Innamorera Di Me(안개 낀 밤의 데이트)' 등이 수록된 데뷔작 "Marisa Sannia"를 시작으로 'L'amore E Una Colomba(사랑은 비둘기처럼)'이 실린 "Marisa Sannia Canta Sergio Endrigo E Le Sue Canzoni"(1970), "Marisa Nel Paese Delle Meraviglie"(1973), 등의 앨범을 내며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그녀는 그러나 1976년 앨범 "Lapasta Scotta"을 끝으로 활동이 뜸해졌고 1984년에 산레모 가요제에 얼굴을 드러낸 이후 별다른 소식을 전해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1993년 "Sa Oghe De Su Entu E De Su Mare"로 다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며 여전한 노래 솜씨를 보여주었다.
 

 

 

 

 

 

01  L'umanita - Caterina Caselli
02  Ce Soir Je Ne Dors Pas - France Gall
03  Quelli EranoI Giorni - Gigliola Cinquetti

04  Asi Fue Nuestro Amor - Mocedades
05  Les Enfants Du Soleil - Vicky Leandros
06  Le Facteur - Georges Moustak

07  La Nuit - Adamo
08  Pascale - Rene Simard
09  Chim Chim Cheree - Mary Popp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