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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기다림과 여행하는 것이다♡

파두(Fado) 음악 본문

음악,영화/샹송.칸초네.파두

파두(Fado) 음악

dhgfykl; 2009. 7. 22. 18:06

    

 

 

 

 

◆ Fado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민속음악으로, 발원지는 수도이자 항구도시인 '리스본'과 북부의 교육도시 '코잉브라'(Coimbra)가 양대 도시로 꼽히지만 우리에게는 리스본의 번화가에서 많이 불리는 것이 친숙하다. 특히 '포르투갈의 목소리' '파두의 여왕'으로 불린 가수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alia Rodrigues)에 의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파두는 19세기 전반에 오늘날의 형식으로 굳혀졌다고 하며 무엇보다 포르투갈 민중의 한을 담은 구슬픈 가락이 특징이다. 가히 그 애절함은 젊은이들이 들을 때는 '청승맞다'고도 할 수 있다. 청승은 파두의 분위기를 압축한다. 파두는 '숙명'을 뜻하는 라틴어 파툼(fatum)에서 파생되었다. 거기서 풍겨 나오는 강력한 향수와 한을 포르투갈에서는 사우다데(saudade)라고 불리는데, 영어로는 노스탤지어와 유사하며 원어의 뜻은 '강렬한 바람'이라고 한다.

기원에 관해서는 '뱃사람의 노래'라는 이야기를 비롯해 죄수의 노래, 브라질과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노래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음악인 모디냐(Modinha)의 영향과 인접한 아프리카의 요소가 오랜 세월에 걸쳐 작용한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에 앞선 것은 아랍 문화의 영향이다. 8세기 초반 포르투갈의 이베리아 반도는 아랍의 무어인의 침략을 받아 550여년의 지배를 받았다. 파툼에 아랍적 숙명관이 깃들어있는 것이 말해주듯 포르투갈에는 아랍의 문화가 도처에 산재해있다.

애초부터 숙명적인 정서를 토대로 한 파두가 한층 애조를 띠게 된 것은 격동의 포르투갈 현대사와 무관하지 않다. 1932년부터 1968년까지 36년간 포르투갈은 재정학자 출신인 안토니우 살라자르의 철권 독재통치 아래 신음했다. 국민적 저항을 무력화하고 관심을 정치 아닌 딴 곳에 돌리기 위한 일종의 우민화 정책으로 그는 축구(football) 종교(fatima) 그리고 파두(fado) 이른바 3F 정책을 폈다. 정치적 경제적 고통과 절망에 눈물을 흘린 포르투갈 사람은 파두에 더욱 그들의 슬픔을 아로새길 수밖에 없었다. 독재정치 하에서 '사우다데'는 국민적 정서로 내재화되었다.

처연한 리스본의 파두는 여가수들이 득세한 반면, 상대적으로 평온하고 밝은 감을 띠는 코잉브라 파두는 반드시 망토를 걸친 남자만이 부르는 전통을 보유, 양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존재한다. 파두 트리스테(fado triste)와 파두 메노(fado menor)라 불리는 고전적인 곡조는 상기한 것처럼 청승맞다고 할 애조가 두드러진다.

2박과 4박의 단순한 형식이며 아무래도 단조가 많으며 코드 또한 결코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미묘한 싱커페이션(당김 음)에 가락은 섬세해 가수의 노래솜씨에 따라 풍부한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업적이 바로 이것이다.

파두의 가수(파디스타로 불린다)는 대규모 공연장이 아닌, 보통 '파두의 집'(casa do fado)으로 불리는 살롱을 무대로 노래 부른다. 많은 청중을 상대하지 않고, 관중과 무대가 일체되는 소규모 공연장이 어울리는 셈이다. 반주는 보통 파두의 애절한 정서를 결정하는 포르투갈의 전통 기타인 12현 '기타하'(guitarra)와 비올라 베이스 등 세 악기로 구성된 밴드가 맡으며 흔히 검은 옷을 입는 파두 가수는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육성으로 노래한다.

 

 

파두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라(Maria Severa/1820∼1846)

 

리스본에서 태어난 파두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라(Maria Severa/1820∼1846) 이후 모든 여성 파두 뮤지션들은 모두 그녀의 검은 옷과 맨발을 흉내냈다.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루드리게스도 예외는 아니다. 마리아의 스타일 자체가 파두의 전통이 된 것인데, 파두의 음악적 형태도 많이 변화했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파두 리바이벌 붐'을 필두로 다양한 뮤지션들에 의해 파두는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최근의 파두를 돌아보면 그 다양함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아말리아 루드리게스의 딸인 둘세 뽄쯔(Dulce Pontes)-한국 가곡 보리밭을 절묘하게 리메이크 했던 미샤(Misa)-포르투갈의 엔야로 불리는 테레사 살게이로(Teresa Salgueiro)가 중심이 된 크로스오버 그룹 마드리듀쉬Madredeus)...이들은 전통 파두를 기반으로 각각 자신들만의 개성을 불어넣으며 신세대 파두 스타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국내에서 파두는 1950-60년대 라틴음악이 유행하던 시절,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MBC 주말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1954년에 부른 대표작인 'Barco negro(검은 돛배)'가 삽입되어 다시금 음악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파두의 대표주자인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1999년 10월6일 79세를 일기로 타계했을 때, 포르투갈 정부는 즉시 3일 동안의 국가 애도기간을 공포하며 국장을 치러주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리스본 파두를 대표한다면 코잉브라 파두에는 주제 아폰수, 페르난두 마샤두 소아레스 같은 거장들이 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이후 차세대 주자론 파두 특유의 구슬픔을 대물림한 여가수 미지아(Misia)가 유명하며 둘스 폰테스(Dulce Pontes)는 영화 <프라이멀 피어>에 'Cancao do mar(바다의 노래)'가 삽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내한 공연을 갖기도 한 베빈다(Bevinda)는 조금은 덜 포르투갈적이며 현대화된 파두를 들려준다. 파두는 월드뮤직이 관심이 고조된 새 천년 들어 국내에서 다시금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포르투갈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가지다. 타일에 그림을 그린 화사한 ‘아줄레주’, 그리고 포르투갈 전통음악 ‘파두’다. 포르투갈인들에게 파두가 갖는 의미는 음악 이상이다. 파두는 지금 세계 음악계에서 무척 사랑받고 있는 중요한 음악이자 포르투갈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파두는 운명, 혹은 숙명을 뜻하는 아랍어 'Fatum'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랍의 지배, 스페인의 지배 등의 암울했던 포르투갈의 역사와 ‘대항해 시대’에 바다는 포르투갈인 들에게 정복해야 대상이자 동시에 희망을 갖게 하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개척지로 향하는 배에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했던 여인들, 그리고 바다를 항해하며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했던 뱃사람들, 숙명처럼 떠나고 떠나보내야 했던 포르투갈인들의 애환과 인생이 반영되어 파두에는 향수와 동경, 슬픔과 외로움 민족 특유의 정서 Saudade 사우다쥐가 담겨 있다.

그래서 사우다데를 관객들과 교감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가슴 깊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내면적인 울림을 끌어내는 것이 훌륭한 Fadista 파디스타(파두 가수)조건이라고 한다.

 

 

파두의 기원

'포르투갈의 음악에는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파두'라고 답변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파두 역시 처음부터 포르투갈 전체를 대표하는 음악은 아니었다. 즉, 파두 이전부터 포르투갈 각지에는 고유의 민속음악이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자.  

파두의 고향을 찾아가 보려면 리스본의 알파마(Alfama) 지역에 가야 한다. 이 곳은 '못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19세기 초 이래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등 포르투갈의 식민지로부터 역이민 해온 흑인들과 혼혈인들, 이른바 끄리울루(crioulo)가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알파마를 둘러 보면 파두가 '순수한' 포르투갈인들의 음악 문화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아프리카와 브라질 등에서 포르투갈로 온 이주민들은 자신들의 음악 문화를 함께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 앙골라의 반투 족의 원무(圓舞)를 위한 댄스 음악인 룬두(lundu)나 포파(fofa)가 대표적이다. 즉, 당시에는 파두라는 단어도 룬두나 포파 등의 용어와 더불어 '기타 연주를 수반한 아프리카적 요소가 강한 댄스 음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 파두의 정의는 점차 바뀌게 된다. 아프리카로부터 영향받은 리듬 위에 포르투갈의 시적 전통이 내용을 공급하고, 브라질에서 역수입된 발라드 형식인 모지냐(modinha)가 형식을 공급하여 1920-30년 경에 오늘날의 파두의 원형이 정착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자연스럽게 포르투갈의 다양한 민속음악들도 파두의 형성에 기여했다. 이 무렵부터 파두는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라기보다는 감상하는 음악으로 정착되었고, 헤띠루스(retiros)나 띠삐꾸스(tipicos)라는 전통 레스토랑에서 연주되었다.

파두의 원형이 정착되기 훨씬 전인 19세기 초중반에도 파두의 존재는 확인된다. 1836년경 한 귀족(물론 남자)이 바를 찾아가 마리아 세베라(Maria Severa)라는 파디스타(fadista)가 노래하는 것을 들은 뒤 그녀와 "격렬한 치정 사건"에 빠졌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불행히도 사건의 기록만 남아 있고 음악의 기록은 없지만, 검은 숄을 어깨에 걸치고, 술 취한 듯한 무대 매너로 노래부른 세베라가 많은 남자들을 사로잡았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져 온다. 오늘날까지도 여성 파디스타들이 검은 모자와 의상으로 무대에 오르고, 때로는 와인이나 꼬냑을 담은 유리잔을 손에 들고 노래부르는 것의 유래를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사건은 수십년 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탱고가 일으켰던 것과 비슷한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역설적으로 파두가 대중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두의 어원은 '운명'이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인 파뚬(fatum)이라고 한다. 그런데 파두는 자신의 운명에 대처해 나가기보다는 운명을 인정하는 음악이고, 그러다 보니 대부분은 단조의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고된 운명, 배신당한 사랑, 죽음과 절망 등이 파두 가사에 등장하는 주요한 테마인데,, 이 정서는 사우다데(saudade)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진정하고 강렬한 갈망'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가수나 연주자뿐만 아니라 청중의 태도까지도 결정하는 파두 특유의 정서다.

파두의 악기들...그리고 '꼬임브라 파두'

파두는 기본적으로 '노래 형식(song form)'을 지칭하지만 독특한 기악을 수반한다. 이를 위해서는 포르투갈에 고유한 악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포르투갈 기타', 기따라 뽀르뚜게사(guitarra portuguesa)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통상적 기타와 달리 움푹 패인 부분이 없고 둥그런 몸체를 가지고 있으며 두 줄이 한 쌍을 이루어 12줄로 이루어져 있다. 또하나는 비올라(viola)인데 '클래식 기타'를 말한다. 한편 우쿨렐레와 비슷한 까바끼뉴(cavaquinho), 만돌린과 유사한 반돌림(bandolim)도 즐겨 사용한다. 건반악기로는 아코디온이 종종 사용된다는 점도 추가로 지적해 둔다. 파두의 기악은 벤딩이나 농현(弄絃)같은 주법을 통해 낑낑거리는 소리나 차임벨같이 맑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

기따라의 종류와 주법은 파두의 두 개의 유파(school)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까지 보았던 알파마 파두였다면, 다른 하나는 '꼬임브라 파두(Coimbra Fado)'라고 부른다. 포르투갈 북부에 위치한 전원적 소도시인 포르투갈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인 꼬임브라 대학교가 있는데 이곳이 꼬임브라 파두의 탄생지다.  
꼬임브라 파두에서 사용하는 기따라는 알파마 파두에서 사용하는 것에 비해 크기가 크다. 단지 크기의 차이뿐만 아니라 악기의 주법이나 해석이 세련되어 있다. 나아가 가사도 시적이다. 도식적으로 비교한다면 알파마 파두가 도회적이고 민중적이라면, 꼬임브라 파두는 전원적이고 지성적이다.  

꼬임브라 파두는 1920-30년 경부터 많은 '파디스따'와 '기따리스따'를 낳았고 레코딩도 남겼다. 이들은 포르투갈의 농촌 지역인 베이라 바이샤(Beirra Baixa)와 알란떼쥬(Alantejo) 지역의 전통 민속 음악을 발굴하는 작업도 병행하여 파두의 영토를 확대했다. 꼬임브라 파두의 업적은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포르투갈 기타(혹은 클래식 기타)의 거장들인 페르난도 마차두 소아레스(Fernando Machado Soares), 까를루스 빠레데스(Carlos Paredes), 아르메니우 지 멜루(Armenio de Melo) 등의 연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꼬임브라 파두가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음악으로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꼬임브라 파두로 경력을 시작한 주제 알폰수(Jose Alfonso: 1929~87)같은 인물은 지방의 민속음악으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고 여기에 시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가사를 결합한 노래 형식을 개발하여 후대에 노바 칸싸웅(nova can  o)'이라는 흐름을 탄생시켰다. 가까이는 카탈루니아의 노바 칸쏭(nova can o), 멀리는 아르헨티나/칠레의 누에바 칸씨온(Nueva Cancii n)과 더불어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노래운동이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그리고 그 이후

현대 파두의 여왕은 단연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다. 1999년 10월 6일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79살의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포르투갈의 수상 안또니우 구떼헤스(Antonio Guterres)는 3일간의 국장(國葬)을 선포했을 정도니까... 1920년 알파마의 빈민촌에서 태어나 행상과 재봉사와 탱고 댄서를 전전하다가 19살 때 직업 가수로 데뷔하여 1년이 지나지 않아 스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내려온다. 그녀는 1944년 전쟁을 피해 브라질로 가서 파두를 국제적으로 전파시킨 뒤 1955년 중반 이후 "Coimbra", "Lagrima", "Barco Negro"같은 레코딩으로 국제적 히트를 기록했다. 아말리아의 노래는 도회적 분위기의 알파마 파두와 농촌 분위기의 꼬임브라 파두를 결합하면서, 실패한 사랑에 대한 비가를 넘어서 미국의 소울처럼 '영혼으로부터의 절규'를 담았다.

아말리스 로드리게스가 은퇴한 이후 파두는 파두는 팝 파두(pop fado) 혹은 투어리스트 파두(tourist fado)로 변형된 경우도 있다. 전자의 용어는 '영미 팝의 형식이나 편곡과 결합되어 현대화된 스타일'이라는 점을 지칭하고, 후자는 관광객용 음악으로 '외국인들이 찾는 고급 호텔이나 바에서 연주되는 스타일'이라는 점을 각각 지칭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미지아(Misia)나 둘쎄 뽕찌스(Dulce Pontes)같은 파디스따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대를 잇고 있고 1990년대 말 이후에도 까찌아 게헤이루(Katia Guerreiro), 마리자(Mariza) 등의 신예 파디스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노래나 이미지에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그림자가 너무 강하다'는 인상을 받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는 파두가 새로운 세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까. 단적으로 말해 요즘 포르투갈의 젊은 세대들에게 파두는 '살라자르 시기'를 떠올리는 음악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한다. 살라자르(본명: 안토니우 올리베이루 살라자르(Antonio Oliveiro Salazar)는 1932년 집권한 이래 30년 이상 독재를 행사해 온 인물로 스페인의 프랑코와 더불어 '죽을 때까지 축출되지 않았던 통치자'이다. 살라자르를 계승한 마르쎌루 까에따누(Marcelo Caetano)의 독재 정권이 1974년 군부를 주축으로 하는 혁명에 의해 비로소 타도될 때까지 오랫 동안 포르투갈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파두 음악인들이 독재정권에 충성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살라자르 정권이 1960년대에 알파마 지역에 '파두 하우스'를 만들어 관광객을 유지하는 정책을 실시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전통적이고 상업적인 파두의 일부는 살라자르주의에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파두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살아남아 있다. 운명의 곤경 앞에 '진정한 갈망'의 심정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한 파두의 생명도 다 하지 않을 것이다.  

 http://cafe.daum.net/niegroup

 

파두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목을 최대한 뒤로 젖혀 가슴 속 감정을 뽑아내는 멜리스마 창법,
만돌린 비슷하게 생겼으며 청아하고 감칠 맛나는 음색의 포르투갈 고유의 기타인  기타하   반주  
그리고 이별과 운명을 즐겨 다루는 가사가 그것이다.

파두는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한'에 해당하는 포르투갈 특유의 정서 '사우다드(Saudade)'를 대변한다.
포르투갈인들이 지구상의 어떤 언어로도 번역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우다드'는 굳이 번역하자면
'향수'라 번역할 수 있지만, 단순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 사람과 사물 등 복합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우다드는 독특한 포르투갈인들만이 지니고 있는 슬픈 정서로,
바다를 향한 탈출욕구와 조국에 대한 애착사이에서 방황하는 가운데 생성된
복합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검은 드레스 위에 역시 검은 숄을 걸친 채 곧게 서서 온몸으로 열창하는 파두 가수(Fadista)의
애조 띤 목소리는  심금을 울리며 전율을 느낄 정도로 애잔하다.
가끔은 생각에 잠긴 듯 살포시 눈을 감은 채, 또는 일상의 기쁨을 연상케 하는 신비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랑과 질투와 별리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파두 가수의 노래는
비록 그 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쉽게 황홀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파두의 여신’ Maria Severa onofriana 마리아 세베라

 (1820  1846 11 30)


파두의 역사 속에서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일반적으로 ‘세베라’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대중과 무명시인들의 입에서 전해 내려오던 파두가

19세기 들어 비로소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된 데는 마리아 세베라의 출현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파두 가수이면서 거리의 여자였던 마리아는 귀족인 Vimioso 비미오주지역의 백작
Francisco de Paula Portugal e Castro 와 사랑에 빠졌지만 신분을 뛰어넘지 못한 채 결국 그 귀족에게서 버림을 받고 만다. 그 때부터 그녀는 항상 까만 드레스만을 입고 파두를 불렀다고 한다.
까만 드레스에는 신분을 넘지 못한 실연의 아픔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스물여섯 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서민의 음악 파두를 귀족사회에 보급했던 그녀를 애도하며 이후 모든 여자 파두가수들은 그녀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검은 옷을 입거나 숄을 걸치고 노래하는 전통이 생겼다.
그리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파두의 여왕’ Amalia Rodrigues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1920년 ∼ 1999)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리아 세베라 이후 파두를 더욱 성숙시켜 서민생활의 애환이 묻어 있는 리스본 파두를 세계적인 음악으로 끌어올린 리스본 파두의 대표적인 여가수로 '포르투갈의 목소리', '파두의 여왕'으로 불린다.

'Barco Negro 검은 돛배'라는 노래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프랑스 샹송 가수로 Edith Piaf 에디뜨 삐아프가, 이탈리아 깐쏘네 가수로 Milva 밀바가 있다면 포르투갈엔 ‘파두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말리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파두 트리스테(fado triste) 파두 메노(fado menor) 불리는

고전적인 곡조는 가슴속 깊이 와닿는 애조가 두드러진다.

또한 파두는 2박과 4박의 단순한 형식에 단조가 많고

화성구조(코드)도 결코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미묘한 싱커페이션(당김음)에 가락은 섬세해 가수의

노래솜씨에 따라 풍부한 정취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가장 잘 표현한다고 한다.

또한 단순하고 순박했던 파두의 가사를 시적인 내용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호드리게스가 무대 위에서 언제나 입었던 검은 옷은 ‘아말리아풍’으로 하나의 유행이 되기도 했다.

파두를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그녀가 1999 106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수많은 팬들이 슬퍼하며 운구 행렬을 따랐을 정도로 포르투갈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장례는 3일간 국장으로 치루어 졌다.

 

    * 포르투칼 국민들은
     'fado의 대사' 혹은 '20세기가 낳은 포르투칼 최고의 영웅'으로 불렀다.

      그 영웅의 장례식이 이틀 뒤인 10 8일 금요일 리스본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물론 그 광경은 TV를 통해 전 유럽에 보도되었다.

      그런데 장례미사가 다 끝나고 6명의 상여꾼이 아말리아의 관을 어깨에 메고
     막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성당 안에 있던 모든 조문객들이 일어서서,
    
밖으로 운구되는 그녀의 관을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상여꾼
들이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나가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아말리아의 관이 성당 밖으로 나오자 그곳에 운집해 있던 사람들 역시
     그녀의 관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녀의 관을 실은 장의차가 제복을 입은 기마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지나가는

      길 양옆에도 사람들이 줄지어 끝없는 행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도 그녀의 관을 실은
장의차가 자기들 앞을 지날 때면
     모두들 장의차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아말리아의 삶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반적인 장례식의 슬프고 무거운 침묵이 아닌

      박수를 보낸 것이다.

          >> 박수를 치는 것이 결코 포르투칼인들의 장례관습은 아니다.

 

리스본의 파두가 여가수들이 주를 이룬다면,

반면 Fado de Coimbra 코임브라의 파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학 가운데 하나인 코임브라 대학교 특히, 의과대학에서 꽃을 피웠다. 또한 연주에 사용되는 기타도 리스본 파두에 비해서 크고 연주법이나 해석도 세련되어 있다.

Porto (포르투 ; Oporto - 영어)에도 수많은 파두곡들이 있다. 리스본과 포르투에서 온 많은 학생들이 유학중인 대학도시 Coimbra 코임브라에서 그들의 파두를 나름대로 소화시켜 코임브라 파두라는 장르를 재창조해냈는데, 리스본 파두와는 좀 거리감이 있지만, 파두 본연의 감성을 나타내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아카데믹하며 고대 대학도시의 전통들을 반영한 남학생들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바치는

사랑의 세레나데가 중심이 되고 있으며 나중에는 민중 계몽의 메시지까지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에 접어들며 ‘슬픔’(사우다드)을 주제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 ‘사우두시스무’(Saudosismo)가 발생했는데 이 사우두시스무에 코임브라 대학생들이 슬프고 느린 멜로디를 붙여 노래하게 된 것이 코임브라 파두의 시작이다. 리스본 파두에 비해 평온하고 밝은 감을 띠며 좀 더 예술적인 경향을 담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망토를 걸치고 남자만이 부르는 전통이 있다.

코임브라 파두 가수로는 카네이션혁명의 상징인 Jose Afonso 주제 아폰수 (1929 1987),

코임브라 파두의 포르투갈 기타연주자들로는 Fernando Machado Soares 페르낭두 마샤두 소아레스, Carlos Paredes 카를루스 파레데스, Armenio de Melo 아르메니우 멜루 등이 있다.

 

    * 1974 425, 포르투갈 라디오방송에서는
     코임브라의 파두 가수 Jos
e Afonso 주제 아폰수의
금지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노래를 신호로 한 무리의 병력이 수도 리스본으로 진입했고,

      시민들은 혁명군을 반기며 카네이션을 던졌다.
    
청년장교단에 의한 무혈·명예혁명인
‘카네이션혁명’이 성공하면서
     포르투갈은 40여년의 기나긴 독재에서 벗어났다.

      우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장려됐던 파두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Fernando Machado Soares 페르낭두 마샤두 소아레스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약했던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노래하는
전형적인 남자 파도가수의 모습과는 달리 포르투갈의 기타인 'Guitarra 기타라'

파두 특유의 애잔한 음색을 담아냈다.

아름답고 정감 어린 그의 음성은 짙은 호소력을 지니고 있어
세계의 팬들이 좋아했다.

 

 

또한 파두와 민요의 전통이 혼합된 파두의 형태도 있는데 "파퓰러 파두(Popular Fado)" 라고 불리운다.

파퓰러 파두는 표현되는 정서나 혼이 한결 가벼우며 종종 즉흥적인 연주로 이루어진다.

 

 

Fadista 파디스타(=파두 가수)는 많은 청중을 상대로 하는 대규모 공연장이 아닌,

보통 Casa de Fado 파두의 집으로 불리는 관중과 무대가 일체가 있는 레스토랑을 무대로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육성으로 노래한다.

리스본 파두의 여가수는 흔히 검은 옷을 입고 노래하며,

남자 가수의 경우는 일상적인 차림에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노래한다.

코임브라 파두는 망토를 걸친 남자들이 노래한다. 노래없는 기타연주도 있다.

 

파두의 반주는 비올라-바이수 (viola-baixo, 베이스 기타), 스페인 기타,

금속 12현으로 포르투갈의 전통 기타 '키타라 포르투게사 quitarra Portuguesa' 이루어진다.

자연히 fadista, 파디스타가 앙상블의 중심이 된다.

가수의 목소리에 힘입어 파두는 특유의 조화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때로는 대의 기타 반주로 노래하기도 한다.

기타 연주자들은 풍부한 지방색을 담고 있으며 오히려 관객들은 초라하지만 그러나 엄숙한 밴드에 따뜻한 연민과 애정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Guitarra Portuguesa 키타라 포르투게사 또는 Guitarra do Fado

일반적으로 여섯줄 기타와 함께 짝을 이뤄 연주된다.

파두 기타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시기에 전해진

아랍 류트로부터 발전된 악기인 것으로 추측된다.

 

가사의 표현에서도 그들의 현실을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서민들의 애환을 그린 가사와 서글픈 멜로디 속에는 침울함을 부드럽게 감싸안는

뜨거운 생명력이 감춰져 있음을 부인할 없다 하겠다.

속에는 어떤 부자연스러움이나 흥분, 떨림, 몸부림도 찾아볼 없다.

파두의 가사는 멜로디를 압도하는 없이 없고

단지 기타의 여린 음만이 가수의 목소리를 전적으로 떠받치며 청중들과 교감한다.

 

 

오늘날 포르투갈 파두계의 젊은 뮤지션들은 정통 파두의 맥을 이어가는 부류와

거리낌 없이 파두의 전통적 테두리를 박차고 새롭게 현대화된 스타일로 파두를 재해석해 실험 정신을 발휘해 부르는 움직임으로 나눌 있다. 이름난 뮤지션들은 아래와 같다.

Misia 미시아

    전통적 파두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원형적 형태를 고수하고 있는
    파두 특유의 구슬픔을
대물림한 여가수.

Madredeus 마드리듀쉬

    파두와 클래식을 결합시킨 크로스오버적인 새로운 파두를 선보이고 있는
   5인조 혼성밴드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Fedro Ayres Magalhaes 페드로 아이레스 마갈량에스가

    키보드 연주자 Rodrigo Leao 후드리고 레앙을 만나면서 밴드가 결성되었고,

    이후 세 명의 멤버 탈퇴 후에
    Fedro Ayres Magalhaes
페드로 아이레스 마갈량에스(기타),

    Teresa Salgueiro 테레사 살게이루(보컬),

    Carlos Maria Trindade 카를로스 마리아 트린다쥐(키보드),
   Jose Pexto
주제 펙스투(기타),

    Fernando Judice 페르난도 주디세(어쿠스틱 베이스) 로 팀이 완성되었다.

    특히 Teresa Salgueiro 테레사 살게이루의 목소리는 꿈을 꾸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는
흡사 로렐라이의 전설을 연상케 하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Dulce Pontes 둘체 폰테스

    기타라 외에 아코디언이나 첼로, 콘트라베이스, 신디사이저 등 다양한 악기를
   도입해
파두를 현대적인 모습으로 발전시켜가고 있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딸.

    영화 <프라이멀 피어> 'Cancao do mar(바다의 노래)'가 삽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Bevinda 베빈다.

    역시 기타라 외에 아코디언이나 첼로, 콘트라베이스, 신디사이저 등
    다양한 악기를 도입해

    파두를 현대적인 모습으로 발전시켜가고 있는 내한 공연을 갖기도 한
    Bevinda 베빈다는
조금은 덜 포르투갈적이며 현대화된 파두를 들려준다.

Marisa 마리사

Christina Branco 크리스티나 브랑쿠

Katia Guerreiro 카티아 게레이루

Mafalda Arnauth 마팔다 마르나우스

Teresa Tapadas 테레사 타파다스

Marta Dias 마르타 다이아스

Ana Sofia Varela 아나 소피아 바렐라

Camane 카마네

    파두 젊은 가수 중 몇 안 되는 남성으로 주목 받는다.

    까마네의 음악은 마치 우리 트로트 음악과 흡사한 구수한 맛도 느껴진다.

  

국내에서 파두는 1950-60년대 라틴음악이 유행하던 시절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MBC 주말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1954년에 부른 대표작인 Barco negro 검은 돛배가 삽입되어 다시금 음악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었다. 파두는 월드뮤직이 관심이 고조된 2000년도 이후 국내에서 다시금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는 유럽 음악 하면 샹송이나 깐쏘네를 떠올릴 그리스의 서정가요인 렘베티카나 스페인의 플라멩코, 포르투갈의 파두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하겠다.

동양적인 신비주의적 색채마저 띠고 있는 우수에 젖은 구슬픈 () 노래 파두가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알려지지 못한 것이다.

 

 

대표적인 Fadista(Fado를 부르는 가수를 지칭) Misia,베빈다


 

 

Misia는 포르투갈인의 삶과 정한의 노래, 파두에 현대적이고 예술적인 생기를 불어 넣어 아말리
아 로드리게스 이후 최고의 파두 가수라는 찬사를 얻고 있다
 
생계를 위해 바다로 떠나온 남자들은 가족을 그리워하고, 뭍에 남은 여자들은 남편을 기다리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리움과 기대가 동시에 쌓여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다를 향한 포르투갈
인들의 노래, 파두(Fado)가 생겨난다. 포르투갈의 전통과 함께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파두에
는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아련한 한(恨)의 정서가 깊숙이 깔려있다.

미샤의 아름답고 섬세하면서도 동시에 힘이 느껴지는 보컬은 전세계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
는 포르투갈 특유의 파두 음악을 전세계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파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의 정서와 멜랑콜리를 누구보다도 잘 표현해 내기도 한다.

미샤는 파두의 정수인 멜랑콜리의 정서를 포착하고, 이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조세 사라마구,
포르투갈 현대문학의 아버지 페르난두 뻬소아 등 저명한 문학가들에게 시를의뢰하여 이들의 아
름다운 시로 파두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었으며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아오 피레스와 포르투갈의
기타리스트들을 불러들여 매력적인 파두의 소리를 되찾아 거리의 파두라는 오명을 벗기고 예술
적인 경지로 승화시킨다.

포르투갈의 위대한 유산 파두의 전통을 이어받는 동시에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불어 넣은 미샤
로 인해 이제 파두는 프랑스의 샹송이나 이탈리아 깐소네를 뛰어넘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파두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이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여성 파두 가수들 주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Misia와 Bevinda를 대표적인 파디스타라 할 수 있다.


Misia가 전통적인 스타일에 가까운 파두를 부르고 있는 반면, 1990년대에 우리에게 알려진 Bevinda는 Dulce Pontes와 더불어 '기따라-포르투갈기타'외에 어코디언, 첼로, 콘트라베이스, 신디사이저 등 다양한 악기를 도입해 파두를 현대적인 모습으로 발전시켜 가고 있는 가수들이다.

 특히 베빈다의 파두는 때로는 시원스런 라틴음악의 느낌에 빠지게 하는가 하면 때로는 재즈적인 감석을 느끼게 하는 등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음악 스타일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1961년 포르투갈 북부의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2년 뒤 프랑스로 이주해 삶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 베빈다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어린 시절 그녀는 직접적으로 포르투갈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지닌 조국 포르투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특히, 프랑스에서 오랜 생활을 한 것은 조국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갖게 했으며, 그녀의 음악이 지닌 다양함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다른 파두 뮤지션에 비해 재즈, 클래식적인 감성이 짙게 배어있는 베빈다의 음악은 이 점을 충실히 뒷받침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베빈다의 음악은 우리가 기억하는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류의 정통 파두와는 거리가 있다. 포르투갈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프랑스로 이주해서 파리를 주무대로 활동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10대 시절 처음 직업 가수의 길에 들어섰을 때도 출발점은 샹송이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어쨌든 그녀의 음악은 파두의 기반 위에 샹송과 탱고, 보사노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녹아들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파두의 정통성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비난을 듣기도 하지만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이점이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베빈다는 웬만한 파두 가수들에 비해 훨씬 인기가 있다.


그녀는 미세한 파편이 되어 무의식의 꿈 속에서 조차 더듬어 내기 어려웠을 포르투갈의 기억을 결코 잊지 않았다.
베빈다는 프랑스에서 96년 발표한 앨범 'Terra e ar'에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명곡 'Barco Negro-검은 돛배'와 'Lagrima-눈물'을 새롭게 재해석하며 영원한 마음의 고향, 포르투갈의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대개 '기따라'아 현악기 중심의 곡들로 애잔하면서도 포르투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하고 있는데, 이 앨범은 프랑스에서 성장한 베빈다가 포르투갈인으로서의 자아와 영혼을 어떻게 찾아 가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98년 앨범 'Pessoa em pessoas'를 발표한 뒤 99년 'Chuva de anjos'를 발표한 베빈다의 음악적 여정 역시 끝없는 변화를 추구하며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실험을 보여 주고 있는데 한해 한해 새로운 앨범이 나올 때마다 더욱 원숙한 음악의 깊이를 보여 주고 있어 그녀의 새로운 작업에 한층 기대를 갖게 한다.

 


흐르는곡 Cancao Do Mar(바다의 노래) / Dulce Pon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