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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기다림과 여행하는 것이다♡

침묵의 의미 본문

책 속으로/법정 스님 [무소유(無所有)] 중에서

침묵의 의미

dhgfykl; 2009. 4. 2. 21:59

  

 

 

오원 장승업의 작품들

[ 호취도 (1880) ]
우리나라에 있는 매 그림 중에서 가장 완벽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귀신이 그의 손을 빌려 그린 것 같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언뜻 보아서는 호방한 필치로 일시에 그린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매의 깃털 하나 하나부터 나무결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매서운 매의 눈초리와 날렵한 몸짓이 화가가 얼마나 많은 정열을 쏟아 부었는 지 짐작케 .....
 

현대는 말이 참 많은 시대다.

먹고 뱉어내는 것이 입의 기능이긴 하지만,오늘의 입은 불필요한 말들을 뱉어내느라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고를 하는 것 같다.

이전에는 사람끼리 마주 보며 말을 나누었는데,

전자매체인가 하는 게 나오면서부터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지껄일 수 있게 되었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유언비어나 긴급조치에 위배만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다스리는 사람들의 정책에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그 말의 내용이 아첨이건 거짓이건 혹은 협박이건 욕지거리건 간에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다.

가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풍토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 많으면 쓸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경험이다.



하루하루 나 자신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을 홀로 있는 시간에 달아보면 대부분 하잘것없는 소음인 것이다.



사람이 해야 할 말이란 꼭 필요한 말이거나 '참말'이어야 할 텐데

불필요한 말과 거짓말이 태반인 것을 보면 우울하다.

시시한 말을 하고 나면 내 안에 있는 빛이 조금씩 새어 나가버리는 것 같아 말끝이 늘 허전해진다.

[ 세 사람이 시간을 묻는 모습 (1890) ]
이 그림의 내용은 세 사람이 모여서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 밭이 될 때마다 나뭇가지를 하나씩 놓아 두었는 데 지금 그 나뭇가지가 열 개가 되었다” 며 나이 자랑을 하고 있는 중 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나이의 노인인 듯한데요, 그런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구름이 내려다 보이는 산 위입니다. 아마도 장승업이 그린 이 세 사람은 신선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 신선들은 그가 꿈꾸는 또 다른 자신일 것입니다



좋은 친구란 무엇으로 알아볼 수 있을까를 가끔 생각해보는데,

첫째 같이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면 아닐 것이고,

벌써 이렇게 됐어? 할 정도로 같이 있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면 그는 정다운 사이일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친구하고는 시간과 공간 밖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기도를 올려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기도가 순일하게 잘될 경우는 시공 안에서 살고 있는 일상의 우리이지만 분명히 시공밖에 있게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자꾸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게 되면 그건 허울뿐인 기도인 것이다.



우리는 또 무엇으로 친구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다,말이 없어도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은 그런 사이는 좋은 친구일 것이다.

입 벌려 소리 내지 않더라도 넉넉하고 정결한 뜰을 서로가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소리를 입밖에 내지 않을 뿐,구슬처럼 영롱한 말이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오고 간다.

그런 경지에는 시간과 공간이 미칠 수 없다.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된다.똑 같은 개념을 지닌 말을 가지고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서로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가의 서투른 말을 이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기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사랑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 솔바람 소리와 폭포 (1890) ]
그림 중앙에 세 그루의 소나무가 기품있게 서 있고, 그 위로는 폭포가 떨어지면서 안개가 계곡에 가득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위의 그림은 작아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소나무 아래에 두 남자가 부채질을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답니다. 한가로운 여름날의 조선 산수의 정취가 화면 가득히 담겨 있습니다



사실 침묵을 배경 삼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게 없다.



생각 없이 불쑥불쑥 함부로 내뱉는 말을 주워보면 우리는 소음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칠고 야비해 져가는 현상은 그만큼 내면이 헐벗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안으로 침묵의 조명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성급한 현대인들은 자기 언어를 쓸 줄 모른다.



정치 권력자들이,탤런트들이,가수가,코미디언이 토해버린 말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주워서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골이 비어간다.자기 사유마저 앗기고 있다.

수도자 들에게 과묵이나 침묵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고여 있는 말씀을 비로소 듣는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미처 편집되지 않은 성서인 것이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는 본질적인 의미는 아직 활자화되어 있지 않은 그 말씀까지도

능히 알아듣고 그와 같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 오동나무를 닦고 있는 모습 (1890) ]
장승업은 중국에서 전해오는 고사를 그림의 소재로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위의 그림도 그 중 하나입니다. 중국의 한 학자였던 예찬이란 사람이 있었는 데요, 그는 결벽증이 무척 심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찾아온 손님이 무심코 뱉은 침이 오동나무에 묻었는 데요, 손님이 돌아가자 마자 예찬은 시동을 시켜 그 것을 닦도록 했다고 하네요.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불경에 있는 말이다.

[ 여덟 마리의 말 (1890) ]



일상의 우리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써만 어떤 사물을 인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저 침묵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일체의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허심탄회한 그 마음에서 대광명이 발해진다는 말이다.



참선을 하는 선원에서는 선실 안팎에 '묵언'이라고 쓴 표지가 붙어 있다.

말을 말자는 것.말을 하게 되면 서로가 정진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집단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시와 비를 가리는 일이 있다.시비를 따지다 보면 집중을 할 수 없다.

선은 순수한 집중인 동시에 철저한 자기 응시인 것이다.

모든 시비와 부별망상을 떠나서만 삼매의 경지에 들게 된다.

말은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잡음의 역 기능도 동시에 하고 있다.

구시화문,입을 가리켜 재앙의 문이라고 한 것도 그 역 기능 면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선승들은 3년이고 10년이고 계속해서 묵언을 지키고 있다.

그가 묵언 중일 때는 대중에서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수도자들이 이와 같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침묵이라는 여과과정을 거쳐 오로지 '참말'만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 괴석 위에 선 닭 (1896) ]
황량한 배경이 겨울로 느껴지는 것처럼, 장승업의 말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늙어서 힘이 없는 듯, 닭의 털색조차 바랜 듯하네요. 다른 암탉들도 거느리지 못한 채 기이한 암석 위에 홀로 외롭게 서있는 늙은 장닭의 모습에 장승업은 늙고 지친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침묵의 조명을 통해서 당당한 말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벙어리와 묵언자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칼랄 지브란은 우리들이 해야 할 말을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언어의 극치는 말보다도 침묵에 있을 것 같다. 너무 감격스러울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는 할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마땅히 입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도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인 것이다.그와 같은 침묵은 때로 범죄의 성질을 띤다.

옳고 그름을 가려 보여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침묵은 비겁한 침묵인 것이다.

비겁한 침묵이 우리시대를 얼룩지게 한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시키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는 것이다.

수도자가 침묵을 익힌 그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장승업의 그림에는 조선땅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닭이 많이 등장합니다. 당시에 닭은 귀신이나 질병 같은 악한 기운을 쫓아낸다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그림으로 많이 그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