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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기다림과 여행하는 것이다♡

장사익 본문

음악,영화/@뮤지션·국내

장사익

dhgfykl; 2009. 1. 30. 17:09


 

    

 

 

 

미국이 감동한 장사익만의 음악세계를 선보여........

2007년 6월 무모하리만큼 시도한, 그러나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미국 4개도시 공연 - 뉴욕, 시카고, 워싱턴,
LA-에서 미국동포는 물론 현지인에게도 진한 감동을 주었다. 동포들에게는 고국의 향수와 고국애를 심어줌은
물론, 미국현지인에게도 폭발적인 가창력과 독특한 선율로 그야말로 경악과 감탄의 찬사를 얻음과 동시에
월드뮤직으로서의 가능성을 선보인, 세계가 감동한 장사익의 음악세계를 선보인다.





▣장사익의 노래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 장사익

길을 가다가 혹 우연이라도 한 번 그의 노래를 들으면 노래 부른 이가 누구인지 묻고 기억하게 만드는 소리꾼, 언뜻
보면 삼베적삼처럼 깔깔한 듯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더없이 유연하고 감칠맛나게 가슴을 파고드는 특유의 목소리로,
우리고유의 가락과 가요의 애잔한 정서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진정한 이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구성지게 부르는 그의 소리는, 노래란 바로 저렇게 부르는 것이며 옛 우리민족이 부르던 노래는 원래 저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뛰어난 가창력을 바탕으로 국악과 팝, 대중가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세계를
소화해 내며 독특한 해석과 국악풍의 거침없이 내지르는 자연스런 창법으로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 장사익의 살아있는 노래, 인간적인 노래, 감동적인 노래들이 그의 삶의 이야기와 함께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펼쳐진다. 이미 여러 번의 소리판을 통해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장사익 음악의 진면목을 이번 공연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소박한 음악세계 그러나 세계를 감동시킨 열정과 혼을 담은 소리

가슴속에 묻혀있던 음악을 끄집어내어, 보통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듯 구성진 목소리로 토해내는 그의 소리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발견한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 하며 버거운 인생의 지게를 잠시 벗어버릴 수 있는 장사익
소리판은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박한 감동의 무대갈 될 것이다.

풋풋한 황토색 같은 빛깔의 노래

촌부의 텁텁한 흙 냄새가 묻어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 장사익. 사람 사는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그의 목소리는
인생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풋풋한 황토빛이다. <찔레꽃>,<하늘가는 길><아버지> 등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자연과 함께하는 그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가슴 터질 듯한 감동이 밀려온다.

 


 

소리꾼 장사익의 음악 이야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장사익이 만들고 부르는 노래는 그의 가슴속에 묻혀있던 흉금을 끄집어 낸 것들이다.
이 노래들의 원초적 출발은‘흥얼거림’으로 삶의 깊이를 고스란히 가락에 옮겨 실은 과정이다. 이는 노래를 작곡한다기 보다는 소리를 "빚는다"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실지로 그는 자기의 노래를 "엮음"으로 표현한다.

그의 초기음악은 그가 살아온 인생을 담은 내면의 독백이자 내밀한 일기였다.
찔레꽃, 귀가, 국밥집에서. 꽃, 섬 등은 그의 이야기일 뿐이었으나, 결국 보통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의 노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따스함과 희망으로 다가와 자연스레 감동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장사익의 음악은 자신의 삶의 영역을 더 넓고 깊게 펼쳐가고 있다.

허허바다, 기침, 반달, 파도, 나그네, 사랑굿 등... 채우며 버리며 희망을, 성찰을, 사랑을... 처절하지만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또한 삼식이, 나그네, 웃은 죄 등은 동화적으로 지난날들을 회상케 하며 잔잔한 미소를 띄우게 하는 인생의 유희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전부 시로 엮어진 그의 노래들은 한번 들으면 식상해지는 요즈음의 노래들과는 달리
시간적, 공간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인생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고 있다.



소리꾼 장사익의 음악 형식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장사익의 노래는 무정형으로 기존의 음악적인 형식과 틀을 벗어나 처음에는 황당스레 들려왔으나, 시의 운율과 현대인의 감성과 호흡으로 노래를 엮어 불러왔기 때문에 이제는 오히려 새롭고 자연스럽게 들려지고 있는 것이다.(섬, 국밥집에서, 허허바다, 파도, 기침 등)

그의 형식의 특징은 국악, 재즈, 무속, 가요 등의 요소를 적절히 사용하여 독특한 성향으로 표현되어 많은 시도를 통해 공연을 해 왔다.

이번 공연에서도 기존의 음악에 새로운 편곡과 편성으로 색다른 음악형식을 보이고자 한다.

찔레꽃, 섬, 국밥집에서, 하늘가는 길 등은 오케스트라와의 접목을 통해 새롭게 재해석 될 것이며 특히 ‘하늘가는 길’은 한국적인 레퀴엠으로 승화시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져 어둡고 슬픈 죽음을 장엄한 상여소리로 재구성 하여 가장 우리적인 소리로 다가 올 것이다.

또한 기존 음악 형식에 국악과 재즈의 요소를 가미한 나그네, 허허바다, 파도, 기침, 귀가 등이 있으며, 김초혜 시인의 사랑굿, 허형만 시인의 아버지, 이선이 시인의 반달 등, 새롭게 엮은 노래도 선보일 것이다.

장사익 공연의 백미인 후반부에서는 주옥같은 대중음악-봄비, 동백아가씨, 대전브루스 등을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흥겹고 신나게 노래한다. 앞서 부른 노래의 진지함의 무게를 천지개벽하듯 훌훌 털어 버리며 노래한다.

그것은 맺힘의 풀어버리는 미학일 수 있으며, 유희적이지만 장사익의 진정한 노래의 의미전달 방법이기도 하다.

장사익의 노래는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의 음악세계를 차츰 확인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으며 우리들 삶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울고 웃으며 그리고 벗어내는 인생의 살맛을 더해주는 신명난 소리판이 될 것이다.

 

 

노래를 '산다'는 것 *******************************************************

당신이 <하늘 가는 길>을 들었다면 그 이름 석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장사익이 마흔일곱에 생애 처음 낸 앨범은 백만 개의 시름을 내장한 목청으로 우릴 위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단지 가슴에 숨긴 것을 끄집어내 풀어주고 싶다고만 말할 뿐.

압구정동 맥도날드 앞, 새끼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인 남자가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생전 갈아본 적 없는 묵은 밭 같은 행장으로, 언제나 반대편에 서있는 듯한 소쇄한 얼굴로 그는, 패스트 푸드점에서 커피를 마시는 건 처음이라고 주저하며 말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서태지가 <하여가>를 부를 때 태평소를 불기도 하던, '94 전주대사습에선 '금산농악' 태평소 연주로 장원을 한, 사물놀이팀 '노름마치'에서 태평소를 불던, 가끔 임동창과 협연을 하던, 갈피마다 수줍게 포효하던 그 사람이 장사익이다. 그리고 오랜 잠복기를 거쳐 지난해 그가 발표한 생애 첫 음반 [하늘 가는 길]은 이제 사상을 갖고 싶은 사람들의 가슴에 조용히 용납되고 있다.

"난 한 사람이 듣고 만족하는 게 중요해요. 백 사람의 만족은 필요없어요."

클론이나, 김건모에 도발된 이들은 세상 모든 노래가 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바라보는 세상처럼 소스라쳐야 하는 줄만 알겠지만 (그 끔찍한 왜곡!), 미안하게도 장사익은 너무 구별돼 차라리 도망칠 수 없다. 백만 개의 시름을 내장한 목청, 심연에서의 외침, 가슴 속 침전물들을 가만히 닦아주는 보컬로 상대가 비틀거리도록 내 버려두면서, 누군가 그의 노래가 장강(長江) 같다더니 과연, 이라는 찬양시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아무리 그가 "나한텐 슬픔이 별로 없슈"라고 말해도.

그가 가수로 '데뷔'한 건 마흔일곱 살 때. 이 조로증에 시들어가는 대한민국에서, 치사하게 나이를 속이기 바쁜 꿈의 영웅들을 같잖아 하다가 그렇게 '연로한' 가수를 만나다니... 친절한 손바닥으로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 하지만 그는 말하기를, 젊은 가수보다 며칠 더 살았다는 것으로 할 얘기가 더 많다고, 지금이 노래를 부르기 가장 좋은 나이라고.

"나한텐 인생의 높낮이가 있어요. 그 내용들이.
내 얘기가 가슴 속에 묻혀진 것들일 때 전 사람들이 교감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가슴 속에 숨긴 걸 끄집어내 개운해지도록 풀어내는 노랠 하고 싶어요.
한을 풀어주는."

참 생산적인 숨통이다. 그는 자본, 가요시장, 팔린다는 것, 개런티, 그리고 대체로 운 좋은 삶과 너무 무관하다. 차라리 책 몇 권을 만들 만큼의 고단한 사연들이 그를 수식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그 흔한 한국 남자로 다가올 뿐. 그러니까, 충남 홍성군 광천, 기민하지 못한 농부의 아들로 나, 풍요가 아니라 풍경 속에서 장성하면서 (때론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 풍경에 매혹되긴 오히려 쉽지 않지만), 노래깨나 한다는 소릴 곧잘 들었고, 그 소린 언제나 뇌엽 깊숙이 새겨져 그의 날들마다 하나의 강령처럼 그를 조율하고 있었고, 급기야 신사동 중국성 옆에서 '밧데리' 가게를 하던, 그다지 양명하지 못한 서른일곱 한가운데서 일생의 딱 3년을 태평소를 부는 데 바치자고 작정했고, 그 길로 소리와 대금과 피리를 배우고, 전주대사습에서 태평소로 장원을 하고, 사물놀이패와 임동창을 만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지난해 어느 하루 그는 음반제작 제의를 거절하지 못한 채 만가 <하늘 가는 길>과 ,<찔레꽃> <귀가> <꽃> <섬> <국밥집에서> 같은 그가 지은 노래 다섯 곡과, <봄비> <빛과 그림자> <님은 먼곳에> 같은, 그야말로 불후의 유행가들을 리바이벌했다. 악보도 없이, 그 앨범은 고립되어 '그밖의 앨범'이었다가, 그의 노래에 흡반처럼 달라붙은 사람들에게 발굴되어 이제 밝은 천지를 보게 되었다.

"사회에 나온 30년 동안 회사생활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난 지금 내 길을 찾은 거예요. 노래를 하는 건...
내가 유일하게 숨을 쉬고 잘할 수 있는 것.
난 노래한다는 것 때문에 딴 건 다 거둬 버렸어요.
그래서 마음이 좋죠. 크게 생각할 것도 없고."

그가 쓴 가사들은 조용하다. 조용하면 많은 게 들린다.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내 노랜 반주를 종소리로 할 수 있고,
파도소리로도 할 수 있고,
장터소리로도 할 수 있어요. 이게 다 자연예요.
전 꼭 그렇게 할 거예요.
장사익 스타일이 다른거죠 뭐."

촬영할 때 그는 <산바람 강바람>과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을 불러주었다. 산 위에서 부는 시원하고 고마운 바람이 그렇게 불길하게 삐걱거리는 부두처럼, 폭풍의 언덕에서 맞는 광포한 바람처럼 육박해올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장난으로라도 생각할까? 그렇게 갑자기 기습해오는 그가 사랑스럽다.

"저유? Y세대쥬. X세대 담엔 Y세대 아뉴?" 하고 눙칠 줄 아는 그가, 맥도달드에서 다 먹지 못한 프렌치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아까워하는 그가, 촬영을 위해 미안할 만큼 깨끗하게 손질한 한복을 꺼내는 그가, 그리하여 사람들의 맺힌 것을 풀어주리라는 그가.
그리고, 잊기 힘든 그 사람의 한마디를 보태고 싶다.


"나는 노래를 하지 않고 노래를 살지요."

 

 

 

장사익은 45세라는 약간? 늦은 나이에 가수로 데뷔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25년 동안 10여군데 회사를 전전하다가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적지 않은 나이에 가수로 나선 것이다.
그는 "이상(노래)과 현실(사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사회를 버렸다"고 말했다. 태평소 연주로 음악을 시작한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는 삶이 녹아나거나 자신이 경험한

인생이야기가 담겨 있는 시적 가사에 우리 고유의 가락을 잘 조화시킨 특유의 창법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자작곡 뿐만아니라 가요, 팝,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본인만의의 창법으로 소화하기도 한다.

그는 한달에 평균 10번꼴로 공연했다. 공연 횟수만 1200회에 이른다. 특히 미국, 유럽, 일본  등 외국에서의 공연은 한국적인 혼과 한을 노래하는 '한국의 목소리'로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한국의 혼을 노래하는 장사익'

장사익은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소리꾼이다. 흔히 말하는 명창보다는 퓨전적인 개념의 명창이다.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지만 누구도 못하는 특유의 소리영역을 만들어 가고 있는 소리꾼이다. 이른바 장사익제(制)라 할 특유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전통 민요가 토리라는 한국의 토속적인 음악언어에 바탕하고 있다면 장사익의 토리는 우리시대의 유행하는 여러 가지 음악언어가 담겨있다. 즉 그의 마음에 맞는 싯귀나 노랫말들은 소리에 얹혀져 노래로 풀린다. “국밥집에서”는 진도아리랑이, “허허바다” 에는 산조가락이, “삼식이”에는 동해안 별신굿의 푸너리 장단이, “하늘가는 길”에는 상여소리가 담겨 있다. 걸죽하니 감칠나게 불러대는 “봄비” “님은 먼 곳에” “동백아가씨” “대전부르스”등을 들어보면 상투성보다는 노래에 담긴 이면적 깊이가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흥을 느끼게 한다. 소위 트롯이나 소울에 담긴 촉촉하고 질긴 정한이 진하디 진한 인간적인 내음이 바로 장사익 소리에 빠지는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어떤 가식이나 규격에 얽매이지 않은 솔직함과 순수함이 장사익의 소리품성이 그대로 그의 소리판에 뭍어난다. 삶이 허망하고 외로울 때 장사익의 노래를 들으면 새로운 삶의 활력이 생길 것이다.

 

장사익은 자유롭다.

턱수염도 부시시 기르고, 다림질이 필요없는 바지에 편한 털덧신을 신고 다닌다.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는데, 알아보는 이도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편하게 산다. 지갑엔 보통 2만~3만원이 있다. 신용카드도 쓸 일이 많지 않다. 이런 장사익의 자유로움과 편함은 상식을 뒤집는 ‘역발상’으로 그의 음악에 그대로 묻어난다.

상여소리 엮어 만든 노래 끝부분에
흥겨운 곡조로 반전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땅 충남 광천에서 불리는 상여소리(만가)를 엮어 만든 <하늘 가는길>의 백미는 마지막 부문이다.

“간다 간다/내가 돌아간다/ 왔던길 내가 다시 돌아간다/어-허아 어허야/ (중략)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잎진다 설워마라/명년 봄이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한번 간 우리인생 낙엽처럼 가이없네” 라며 가는 이를 애닯아하던 장사익은 막판에 흥겨운 곡조를 연출한다.

 

“하늘로 간다네/버스타고 갈까 바람타고 갈까 구름타고 갈까/하늘로 가는 길/ 정말 신나네요”

그 어떤 소리꾼이, 아니 시인이, 하늘가는 길이 신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하늘로 가는길’을 ‘정말 신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소리꾼이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자연인, 인기는 구름 같은 것”

장사익이 ‘소리판’을 벌린다고 하면 한달전에 전 좌석이 매진되곤 한다. 천여명의 고정팬들은 그가 이땅 어디서 판을 벌리든 찾아간다.

심지어 그가 외국에 초청받아 갔을때, 그 외국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인데도 따라다닌 수십명의 ‘광팬’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인기’를 물어 보았다.

“인기요? 인기는 무대 위에서나 있는 것이죠. 무대 밑에 내려오면 누구나 같아요. 무대 위에서 할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하고, 무대 아래에 내려오면 자연인이 되는 것이지요. 인기라는 것이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같아요. 옆에서 ‘너 인기 좋다’라고 말하면 물론 기분이야 좋죠. 그러나 인기는 있다가 없어지는 것. 집착하면 다쳐요.”

» 냉장고에 붙어있는,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소리판 포스터. 실내 곳곳에 붙여 놓았다.
그는 지난해 처음 노래하는 맛을 느꼈다고 했다. 그의 첫 앨범인 <하늘 가는길>이 나온지 10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노래하는 맛을 느꼈다니?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게 노래하는 것이구나. 아마도 난생 처음 노래하는 맛을 느낀 것 같아요.”

태평소로 대회 휩쓸고
국악피아니스트 임동창 만나 본격 ‘소리’

그는 3년전부터 국악기는 손을 놓았다. 나이 탓인지 소리도 하고 악기도 부는 것이 힘에 부쳤다고 한다. 그가 바닥의 인생에서 탈피하고자 ‘딱 3년만 해보자’고 잡았던 태평소는 사실 오늘의 그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태평소는 민간음악에서 당차고 센 소리로 서민들의 시름을 달래주고, 흥을 돋구던 악기다. 태평소에 탁월한 실력을 보인 그는 전주대사습 공주농악(93년)과 금산 농악(94년)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이어 <한국방송> 국악대제전 뜬쇠사물놀이(95년)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하며 국악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면서 장사익은 ‘소리꾼’으로 본격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각종 공연이 끝난 뒤 갖는 뒤풀이에서 장사익은 국악과 가요을 넘나들며 엄청난 ‘내공’이 함유된 노래를 불러젖혔다. 이 즈음 국악피아니스트며 작곡가인 임동창씨도 만났다. 임씨의 권유로 장사익은 노래를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시쳇말로 ‘대박’ 이 터졌다.

시민단체 집회에 별 대가 없이 출연한 ‘재야 소리꾼’

장사익은 시민단체가 여는 각종 집회와 모임에서 어렵지 않게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유명 가객이다. ‘재야 소리꾼’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장사익은 별 대가없이 집회에서 노래하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민주화 시기에 별로 한 게 없어요. 민중가요 한 곡도 몰라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노래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거죠.”

창 밖의 하늘은 꾸물꾸물하다. 기상대 예보로는 눈이 내린다고 했는데…. 북한산을 배경으로 시원스럽게 내라는 함박눈을 보면서, 거장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문득 정원(10평 남짓)에 울려 퍼지던 피아노 연주가 궁금해졌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 장사익이 자신의 정원에 있는 나무과 풀잎들, 정원 옆의 큰 바위, 그리고 자신의 집에 놀어오는 산짐승들에게 들여주기 위해 정원에 설치한 라디오. 방수를 위해 백화점 포장지로 씌운 이 라디오에는 자동 타이머가 장착돼 있어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에프엠 라디오 방송이 자동적으로 자연을 향해 방송된다.

집 뜰 나무와 풀, 산짐승 들으라고 자동 타이머 라디오

» 장사익이 뜰에 나갈때 신는 검정 고무신. 한쪽은 250. 다른 한쪽은 255. 짝짝이다.
“라디오에 자동 타이머를 설치해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에프엠 방송을 틀어 놓아요. 뜰에 있는 나무와 풀, 곤충, 그리고 놀러오는 산고양이 같은 짐승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죠. 좋아들 해요. 가까이 온 산짐승들은 소리치면 가지만, 음악소리 듣고는 가지 않아요.”

어릴적, 고향 광천의 들판이 그리워서 일게다.

그러고 보니 정원 한 옆에 방수종이로 싼 카세트라디오가 있다. 비에 젖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검정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자세히 보니 한짝은 250사이즈이고, 다른 한짝은 255사이즈이다. 짝짝이가 대수랴.



“70~80이 되도록 무대에 설 그런 꿈꿔요”

마무리하는 질문을 던졌다.

“희망이 뭔가요?”

그러자 그의 표정이 더욱 온화해지며 대답한다.

“늘 꿈을 꿉니다. 나이 70~80이 되도록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 무대에 설 수 없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때의 무대는 더욱 멋있을 것입니다 . 읊조리듯, 씨부렁거리듯, 그렇게 노래를 부르다가 가고 싶어요. 늘 꿈꿔요. 그런 행복함을…”

그의 5집 <사람이 그리워서> 타이틀곡인 ‘희망 한단’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채소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희망 한단에 얼마예요”

순박한 아줌마는 이런 엉뚱한 질문에 대해 이렇게 ‘현답’한다.

“채소나 한단 사가세요”

장사익의 행복은 채소 한단에도 만족해진다. 마침내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끝)

태평소의 한국적 감성을 암울했던 시대의 무거운 짐을 벗는 레퀴엠으로 해원하려 했을까.민중가요가 수명을 다해갈무렵,서해바다를 서민들의 삶터로 끌어오는 충남 광천읍내 겟것장터의 비릿내음으로 천지를 울리며 한 소리꾼이 나타났다.죽은 이를 위한 진혼곡,만가(挽歌)로 해원의 씻김을 하려는 몸짓어었을까.

한국인의 서정을 깊은 심장에서 울궈내는 소리의 명인 장사익! 어린시절 아버지의 장고장단에 흥얼거리며 자랐던 장사익은 태평소가 간직한 우리 소리에 몹시도 갈증을 느꼈다던 그는 늦깎이 음악시인이다.권위주의의 암흑시절, 민중의 희망을 노래했던 민중가수들의 처절한 소리가 민초들에게 자유와 인권,생명을 노래했다면 그는 폭압과 권위의 짓누름이 걷히고 허탈한 가슴을 쓸어안고 봄같지 않은 봄이 만연할 때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한국적 한과 서정을 깊은 시심으로 폐부를 짜서 우려낸 소리로 민주화시대,민중시대이후의 새로운 역사소리의 지평을 열었다.관조의 경지에 들어선 그는 이제 태평양을 건너 뉴욕,워싱턴,시카고,LA 등 팝의 메카 아메리카 대륙에 ‘한국의 소리마당을 펼치기 위한 대장정’을 준비하고 있다.한국화보 독자들을 위하여 본지는 “장사익 선생 자택에서 독점인터뷰”시간을 마련하였다.<편집자 주>



인왕산 북한산을 좌우로 펼친 홍지동 산꼭대기
홍지동 산꼭대기에 담갈색 3층집을 찾는데 한참을 헤멨다.장사익 선생의 자택이다.사모님의 전화안내를 받고 이리저리 돌다가 산밑에 이르렀는데 “흰색차량이 맞죠?”하며 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울렸다.정말 반가운 목소리였다.사모님과 선생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2층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감탄사가 터졌다.탁트이는 눈앞에 좌우로 인왕산과 북한산이 떡!버티고 있잖은가! 한국의 소리를 다듬고 빚어 엮어내는 이 시대 명인 소리꾼 장사익 선생의 영감을 샘솟게 하는 “영터”가 아닐까며 뇌아렸다. “선생님,곡을 준비하시면서 답답하실때는 주로 어디로 가십니까?” 기자는 속으로 지리산,태백산,한라산.계룡산이 아닐까 싶었다. “저는 소리를 만들면서 가슴이 답답할때는 고향인 광천의 읍내 겟것장터를 자주 찾습니다.

싱싱한 겟것이랑,온갖 곡식,채소를 옹기종기 내놓고 파는 장바닥 아낙내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흥얼흥얼하고 다니다 보면 막혔던 가슴이 풀리면서 ‘소리’가 다듬어지거든요” 그래서 “파 한 단 사세요!”가 “희망 한 단 사세요”가 된 것일까! “저에 아버지는 장고를 잘 하셨어요.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지면 아버님은 신명나게 장고를 치셨거든요.” 아버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늘(22일)은 국악분야 살펴볼텐데요.장사익의 5번째 앨범 사람이 그리워서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인생을 노래한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인 6곡과 봄날은 간다 등 대중가요 3곡을 장사익 특유의 독특한 음색으로 들려줍니다. 이제 서점가 가보시죠. 교양과학분야에서는 상대성 이론이 1위에 올랐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든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그림과 도표를 곁들인 해설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책입니다.

어린시절 웅변으로 다져진 목소리는 점차 우리의 “소리”에 자석처럼 끌려 인생의 중반을 훌쩍 넘긴 40세 초반, 태평소로 각종 농악경연대회를 휩쓸며 음악계에 입문하기에 이른다. 60~70년대 한국음악이 전성기를 맞으며 대중 속으로 파고들 무렵, 정치적 억압으로 80년대 민중가요로 대표되던 시기를 지나 장사익은 우리의 소리와 신생한 대중음악을 믹스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게 된다. 93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대중음악의 神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서 태평소를 불었던 그는, 이후 해외 오케스트라 협연과 기타, 피아노 등, 대중음악과의 조우를 시험해 해외에 우리의 것을 알리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그의 심오한 시적 가사와 곡을 하듯 토해내는 독특한 창법이 현지 교민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현지인에게는 한국의 투박하고 한을 품은 듯 애절한 느낌의 음악적 감성 또한 그네들의 정서에 어필하기에 충분했다.

40세 초반부터 예순을 바라보는 현재까지 총 5집을 발표하면서 그는 삶과, 죽음, 자연을 위주로 곡을 썼다. 주로 詩에서 곡을 따온다는 그는 제목부터 요즘 대중음악과 다른 느낌이다. 가장 힘이 느껴지는 음반으로 1집을 꼽은 그는 “가장 파워풀하고 객기가 들어있는 음악.”이라고 평할 만큼 삶과 죽음, 그리고 자연을 힘 있게 불렀다. 특히 상여가 나가는 만가(상여소리)를 즉흥적으로 표현한 “하늘 가는길”은 장장 10여분에 걸쳐 죽음에 대한 정서를 토했다. 그의 노래를 이처럼 “토 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의 열정이 깊이가 너무나 깊어 그저 “노래했다”라고 하기엔 한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상가 집에서 곡을 하는 사람은 설움에 온몸을 내던져 울지요, 그것은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분출 되면서 결국엔 후련해지는 것입니다.”장사익의 소리에 대한 견해다. 이 같은 설움이 곧 후련해짐으로 이어지는 것, 즉 살풀이나, 씻김 굿, 고풀이처럼 그의 소리는 우리네가 반만년동안 한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고자 그토록 토해내려 했던 것이다.

그의 음악적 사상을 이해하려면 이 같은 한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뜻인 것이다. 이는 그의 팬 층이 기성세대위주인 이유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은 제 음악을 이해하지 못해요, 대중음악이 너무 사랑에만 치우쳐서 저 같은 삶, 죽음, 자연은 그네들 정서에 맞지 않죠.”자조 섞인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한편, 음악은 어디까지나 오디오이지 비디오가 아니라며 요즘 눈요기 거리의 립싱크 대중가수를 질타하기도 했다.

 



태평소로 국악마당에 , 늦깍기 소리꾼으로!
“선생님은 1980년 서른 초반에 데뷔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녀유.94년 늦가을,제가 46살때죠.하하하..군을 제대하고 카센터,보험회사 직원 등 전전했시유.1980년에는 제가 새납 태평소를 들고 국악판에 연주자로 처음 끼어든거죠.입문이지 데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94년이라고 봐야 돼유.” 그는 한때 농악판 뒷풀이 “판막음”으로 이름을 떨쳤던 재야 소리꾼이기도 했다.판막이는 최고의 소리꾼 몫이다.판의 대미를 장식하고 무대를 마치는 게 “판막이”다. 그는 “정말 자기가 꼭 하고 싶은 것을 ‘꿈’으로 하고 그 꿈을 접지말고 일념으로 나아가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태평소가 그리웠던 그는 “정말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심정으로 무작정 뛰쳐나와 서울의 학원가에서 태평소를 불기 시작했다. 그렇게 입문한 소리꾼이 오늘날 한국음악을 대표하는 거물이 될 수 있었을까. “사람은 꿈이 있어야 되요, 꿈을 꼭 가꿔야 합니다.어떤 인기나 명예에 편승하면 안됩니다” “장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하여 팬들은 ‘장르‘에 대해 해석이 분분합니다.” “저는 그저 제 한을 노래합니다. 그것을 듣는 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리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듣는 이의 몫인 겁니다.” 며 퓨전자체도 하나의 장르임을 역설하였다.

“선생님의 창법은 워낰 독특해 후진들이 뒤를 잇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후진양성이요?, 소리 내는 법은 가르칠 수 있지만, 그게 어디 되겠습니까. 그게 한국의 소리가 갖는 ... 자기 삶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죠.” 한국인의 정서를, 한을 인위적으로 가르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우쳐 주기를 바랬다. 뒤를 이어줄 후계자도 스스로 한을 느끼고 경험하기를 바라는 듯. 부모님 살아생전에 자신의 하늘을 덮어주던 그 보호막이 사라지던 날, 그 자신이 도리어 보호막이 되면서 좀 더 하늘과 맞닿아 간다는 그는, 그의 앨범에서도 알 수 있듯이 1집부터 5집 사이의 정서는 점점 하늘과 맞닿아가는 느낌이 든다.

5집은 1집보다 더욱 성숙한 느낌의 인생관을 담았다는 평이 실감이 났다.제5집 이후의 계획을 물었다.“삶, 죽음, 자연을 혼백으로 토하는 한국인의 숨결소리를 미국에 가서 낼려고 합니다. 25명의 스텝진이 함께하는 저에 단독무대죠. 제가 독일공연에서 교포청중들이 ’스폰지‘였다는 감동무대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교포들이 ’한국의 소리‘에 얼마나 목말라하는가 그 현장을 봤거든요. 물론 미국시민들에게도 우리 한국의 소리에 대해 그 진면목을 보여줄 계획입니다.“

 

 

서울 신사동 카센터에서 주차관리하던 장사익은
딱 3년만 노래에 인생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섰다. 마흔 다섯,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기에는 두렵고 난감한 나이였다.

그러나 3년만이라도 평생 그리워 해온 일을 하고 싶었다.
1993년 공주농악에서 새납(태평소)으로 장원한 사람,
사물 놀이패를 따라다니며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새납 불던 사람,
무대 한쪽에 서 있다가 수줍게 웃던 사람,
주연들의 공연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한 곡 구슬프게 불던 사람,
그가 소리꾼 장사익이다.

◇ "내게 노래는 팔자고 운명이다"

지나온 세월은 고단하고 못마땅했다. 노래 없이 살 수 없었고
노래만으로 살 수도 없었다.
뿌리내릴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발길이 닿으면 가슴이 떠날 것을 재촉했고,

가슴이 닿는다 싶으면 회사가 문을 닫았다.
무역회사, 보험회사, 제지회사, 가구회사, 카센터….
30년 사회생활 동안 열 대여섯 곳을 떠돌았다.
노래말고는 재주도 기술도 없었다. 그는 어디서든 몸으로 때우는 일을 했다.
요령 없이 장롱을 나르다가 허리를 다쳐 고생도 했다.
3년 동안 카센터에서 그가 했던 일은 주차관리와 배터리 교환이었다.
노래…. 노래는 세상에 날 때부터 하고 싶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의 농악대에서
장구 잘 치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중학교 시절 5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뒷산에 올라가 고함을 질렀고
노을지는 강둑에 서서 태평소도 불었다.
당시 농악대에서 태평소 불던 김관섭 아저씨가 평생 마음의 우상이었다.
마음에는 언제나 노래가 있었고, 방 한구석에는 늘 기타가 있었다.
고교 졸업 후 직장생활 3년 동안 저녁마다 음악학원엘 다녔다.
군대시절엔 광주 문선대에서 싱어도 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기타 치며 노래하던 좋은 세월은 짧았다.
세상사에 민첩하지 못한 농부의 아들이었고, 음악은 밥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이상을 위해 처자의 호구를 외면할 위인은 못됐다.

노래와 생활 사이에서 장사익은 고통스러웠다.
생활인으로 그는 노래할 수 없었고, 노래할 수 없는 소리꾼으로 그는 슬펐다.
가슴에서는 언제나 어린 귀로 들었던 김관섭의 태평소 소리가 울렸다.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찍은 사진은
대부분 찡그리고 풀죽은 얼굴이다.
노래를 시작한 후 찍은 사진 속 얼굴은 언제나 웃고 있다.
장사익, 그도 몰랐던 표정의 변화였다.
"내게 노래는 엄마의 탯줄 같아요. 노래 없이 살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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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관조하는 시어에 국악과 대중음악의 경계에 있는 소리를 입힌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온 소리꾼 장사익.

4집 "아버지"에서 아버지를 묻고 돌아서던 날 아버지의 환청을 들으며
아버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을 열게 되었고 라며 고백했었고,
노년의 모습을 따듯하게 그린 '황혼길'(5집),
산자와 죽은자가 만나 교감하는 광경을 '무덤'(5집)으로 노래했다.
삶과 죽음을 분리하여 보지 않는 장사익의 관조적 태도는
이번 6집 음반의 타이틀 곡 '꽃구경'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새 음반 타이틀 곡인 '꽃구경'은
"꽃구경을 가자"는 아들을 따라 산에 오르던 어머니가 문득 고려장 임을 깨닫고
홀로 돌아갈 아들을 위해 솔잎을 뿌려 길을 표시한다는 내용이다.
무반주로 진행되는 가운데 흐느끼는 듯한 가사가 도드라지며 마음을 긁는다.

많은 이들이 장사익의 노래를 통해 위안을 느끼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많이 아파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흔다섯에 데뷔한 늦깎이 가수의 신산한 삶이 녹아있는 그의 노래에서
우리들 삶의 희노애락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의 얼굴과 닮은꼴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고단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쉰아홉 해 그의 생애가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더불어 사는 이들이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이 담긴 장사익의 노래는
우리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위한 뜨거운 응원가이다


 

'카우보이 비밥‘과 ’공각기동대‘ 의 천재 뮤지션 칸노 요코가 선보이는 최신 애니메이션 OST. ’마크로스‘, ’에스카플로우네‘의 메카닉 디자이너 카와무라 쇼우지가 메가폰을 잡은 이 작품에서 그녀는 록과 클래식, J-Pop 일렉트로니카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다. 걸작으로 손꼽히는 ’에스카플로네‘를 능가하는 장엄하고 드라마틱한 음악은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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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식물성의 저항’이 느껴진다. 마르고 꼿꼿한 몸에선 소쇄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자분자분 절도 있는 몸짓에선 청량한 대숲소리가 난다. 세상을 향한 말걸기는 호기롭고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은 애달프다. 뼈마디를 울리는 칼칼한 목소리는 얼마나 진국인가. “밥 잘 먹고 똥 잘 누면 행복이지 별거여~” 호탕한 일갈로 담박한 행복론을 펴는 장사익. 마흔 여섯에 가수가 된 그는 삶을 온몸으로 받아낸 특유의 절절한 울림으로 장사익만의 ‘소리’를 길러내고 있다. 지난 2월 그를 자택에서 만났다.

‘하늘 가는 길’ ‘찔레꽃’ ‘허허바다’ ‘봄날은 간다’... 장사익의 노래를 듣다 보면 한줌 흙이 만져진다. 촉촉한 땅의 기운. 자연과 살 맞닿음의 확인. 콘크리트에서 나온 음악이 아니다. 필시 그는 자연 속에 거주하리라 추측했다. 예상대로다. 홍지문 부근, 앞으로는 인왕산 뒤로는 북한산 자락에 그의 집이 놓여있다. 남으로 창을 냈다. 벽면 전체가 유리다. 거실에는 둘레의 나무숲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하늘의 기운이 직통으로 쏟아진다.

“햇살이 참 좋은 날이죠. 여기 앉아 있으면 겨울에 불 안 때도 뜨듯해. 햇살 한 자락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 꽃피는 것. 아기들 살이 포동포동한 것. 이게 다 행복이야. 이따 밤엔 정월대보름이 뜨겠죠. 휘영청 달 보고 감동도 하고 그래야지. 요즘 사람들 바쁘게 땅만 보고 사는데 조금만 고개를 들면 행복이 천지야.”

주변의 것들, 무심코 보아 넘기는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행복으로 엮는 장사익. 그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자세가 바로 행복이라고 말했다. 한참을 하늘에 시선을 두더니 연주가 끝난 악기처럼 잔잔히 읊조린다. “행복은 마음이여, 마음 같어. 가만히 보니 그러네.”

 

 

 

 

 

0.001초까지, 절박하다 그 목청
장아찌 같고 성난 파도 같은 소리꾼 장사익
평범한 농가 맏아들로 태어나, 평범보다 못한 삶을 살다 오십 다 돼 가수가 됐다. 내 몸 같은 시를 골라 마음으로 읊조리며 ‘열에 아홉은 헷갈리며 사는’ 고달픈 인생들과 함께한다. 북한산 자락 높은 집에서 독공중인 그를 보았다.
풀이 있고 돌이 있고, 새 한 마리 높이 날았다.
 
1993년 1월8일은 몹시 추웠다. 고향 저수지 옆 초라한 능선, 언 땅 부수며 겨우 비운 한 자리에 어머니를 모셨다, 아니 부렸다. 귀경길 내내 혼절한 듯 잠만 잔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외출 준비를 했다. 새빨간 핸드백을 메고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꽁무니에 대고 친척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상 당한 것이, 저 가방 색깔 좀 보소.” 살아도 살아도 그리 힘겹게 살다, 갓 오십 넘어 눈도 못 감고 간 그이를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가슴이 막혀 숨이 찼다.
살면서 혹 그리 가슴 막힐 때마다 불현듯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때론 그 소리에 힘을 얻고 때론 어깨 꺾이며 어찌어찌 홀로 사는 법을 배웠다 했다. 그런데 오늘 또 그이가 날 부른다. 한 사내의 목소리를 타고, 그 소리를 빌어 손짓을 한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산 설고 물 설고 낯도 선 땅에 /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 얘야, 문 열어라! /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잠긴 문 열어 제치니 / 찬바람 온몸을 때려 뜬눈으로 날을 샌 후 / 얘야, 문 열어라! /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허영만 시, 장사익 곡 ‘아버지’)
5월2일 대전 충남대 정심화홀. 그득 들어앉은 사람들 새로 강이 흐른다. “얘야! 문 열어라-!” 호통치듯 애원하듯 목청이 터질 때마다 청중들은 흑 하고 숨이 멎는다. 앞자리 앉은 두 아저씨, 아닌 척 눈가를 찍어내느라 손이 바쁘다. 그들도 제 어미 아비의 아득한 부름을 들었는가. 차마 못 잊을 그 때 기억이 사마귀처럼 돋아나는가.
노래가 끝나자 돌연 팽팽한 침묵. 문득 박수가 터진다. 누군가 와-, 악- 고함도 마구 내지른다. 말로만 듣던 장사익(55)의 뜨끈한 한판 소리굿이다.
 
 
그의 노래는 그의 알몸
그렇게 2시간 반. 무대 안팎은 내내 같이 울고 웃었다. 서로의 호흡을 넘나들며 등도 두드리고 춤도 추었다. 장사익은 그의 말대로 참 잘 ‘까불었다’. 장아찌 같은 설움도, 묻혀 있던 신명도, 칼칼한 듯 청아한 듯 찰진 목청에 한껏 실려 바다로도 달려가고 하늘로도 날아올랐다.
사람들은 그의 소리에서 ‘내 얘기’를 보는 듯했다. 노래 간간이 “맞다, 맞어” 하는 한 아낙의 희한한 추임새가 하나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갈수록 장사익은 작아졌다. 가수가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 팬터지 아닌 생활 속의 맨 얼굴 맨발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 무대에서 ‘특별함’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그가 아이로 뵈고 아마추어처럼 느껴졌다. 나이를 쉰다섯이나 먹고, 소름이 돋도록 노래 잘하는 그가.
알고 보니 그의 노래는 그의 알몸이었다. 무방비, 상처투성이, 오래 짐 져 어깨 무너진 이 땅의 보통 아버지 아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소리 한 자락에 제 인생을 죄 걸어 버리는가. 그 모습이 안쓰럽고 또 고마워 사람들은 어느새 그를 믿고 있었다. 척추로 노래하는 그에게 척추로 숨을 맞춰주었다. 스타는 사라지고 그 자리, 한 무더기 찔레꽃 피어 있었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 별처럼 슬픈 찔레꽃 /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 …아 노래하며 울었지 / 아 춤추며 울었지 / 아 당신은 찔레꽃’(장사익 시·곡 ‘찔레꽃’)
아파트 화단, 장미 더미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찔레꽃. 그래도 향기는 가장 알싸하고, 그러나 빛 보기는 아주 틀려 뵈는 꽃. 이 노래를 만들었을 때 장사익은 마흔여섯이었고 아직 가수가 아니었다. 태평소 연주자로 밥벌이가 힘겹던 그는, 그 이태 전에는 카센터 직원이었고, 또 그 전에는 독서실 사장, 가구점 총무, 전자회사 직원이었다. 그런 그가 마흔일곱 살에 가수가 됐다. 되자마자 장안에 뚜르르 이름이 났고, 이제쯤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장사익 류(類)’ 창법과 가락으로 나라 안팎 넘나들며 절정의 소리꾼으로 살고 있다.
네 장의 음반을 냈지만 아무래도 그는 현장 가수다. 돈이 되건 되지 않건, 가고 싶은 자리에 가서 부르고 싶은 노래를 한다. 술 담배를 않는 그는 그래도 맘 맞는 이들과의 ‘뒤풀이 자리’를 가장 좋아하며, 그마저 갈 일이 없을 때는 세검정 집에 앉아 산을 본다. 곁에는 늘 아내가 있고 창 밖에는 봄비 맞아 토끼풀 꽃망울이 몽글 맺혔다.
 
“토끼풀, 쟤가 지 하늘이예유”
장사익의 집을 처음 찾았을 때, 2층 툭 트인 통유리창 밖 풍경을 보곤 한동안 입을 못 다물었다. 서울에 이보다 더 풍취 좋은 집이 있을까. 인왕산이 겸재의 ‘인왕제색도’ 꼭 그 모양새대로 앞을 비껴 우뚝 서 있고, 탕춘대성 이끼 낀 옛 성곽이 마치 울타리인 양 둘러쳐 있다. 내려다 뵈는 뜰로는 집채만한 바위가 쳐들어와 뒷심을 든든히 받쳐주고, 지천인 민들레 토끼풀 강아지풀 사이로 풍경(風磬)이 울고 잔돌맹이가 구른다. 무엇보다 성곽 뒤, 사람 키 열다섯 곱은 족히 될 아카시아나무 세 그루가 ‘그림’의 중심에 서 완벽한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너무 좋지유. 근디 우리 집선 볼 게 얘덜밖엔 없어요. 이거 하나 보구 집을 샀는디…. 내 인생 최고, 최대 사치지유.”
장사익은 마치, 너무 좋은 집에 살아 죄송하다는 듯 코를 찡그리며 수줍게 웃었다. 곁에 섰던 아내 고완순씨가 말을 거들었다.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셔오고 싶었는데 살던 집이 너무 좁아 이사를 해야 했어요. 한번 구경이나 하자 하고 올라왔다가, 그만 이 경치에 홀딱 반해 웃돈까지 주고 계약했지 뭐예요. 근데 막상 이사를 오려 하니 문제가 한둘이 아닌 거예요. 보일러부터 골조까지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이고, 말도 마세요. 집값만도 불감당이었는데 수리비까지 엄청나게 들어가고…. 그러니 어쩌겠어요. 이이가 저리 좋아하는걸.”
“쟤들이 다 제 스승이예유. 하루 종일 이 창 앞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흘러가는 구름도 보구, 산도 보구 풀꽃도 보구. 잘 놀 궁리만 해도 하루 해가 짧기만 해요. 집을 이고 갈 건가 지고 갈 건가, 참말 더 큰 욕심은 이제 없시유.”
장사익이 말을 받았다.
그는 “풀들에게 미안해 잔디를 심지 못했다”고 했다.
“전번에 이이가 한번 호미를 들고 나선 적이 있거든요. 싹 정리한 담에 잔디 심겠다구요. 그런데 한참을 그냥 앉아있다 들어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했더니, 풀들마다 꽃망울이 맺혔는데 맘이 아파 도저히 못 캐내겠더래요. 그래서 그냥 놔두기로 했어요. 근데 저 상태로도 이쁘죠. 전 아주 맘에 들어요.”
다시 아내의 설명이다.
이들 부부는 뜰에 가득 깔린 풀들을 잡초라 부르지 않았다. 풀들도 다 생명인데 ‘잡스럽다’ 하면 얼마나 섭섭하겠냐는 것이었다. “쟤들도 하나하나 이름이 있다, 이름대로 불러줘야 마땅하다”고 했다. 부창부수다.
서울 생활이 벌써 40여 년을 헤아리건만, 장사익의 말투는 갈데 없는 ‘충남도민’이다. 그 중에서도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
“지가 서울 생활 한 지가 1965년부터, 그러니께 벌써 몇 년이여, 38년인디, 지가 서울 말을 못 허는 게 가족들이 여기 다 있응께. 동생애덜은 인자 거의 안 혀유. 나는 발전이 안 되는 것 같어. 만날 개구락지 우는 소리, 소쩍새 우는 소리, 낙엽 지는 소리… 그런 것만 생각하며 사니께. 거기 그냥 꽉 하고 단단히 묶여 있응께….”
 
 
“고래 같구 태산 같은 우리 아부지…”
그는 맏아들이다. 위로 누나 한 명이 있고 밑으로 남동생 둘, 여동생 셋이 있다. 집안 형편은 “그냥 시골에서 밥 먹고 사는” 정도였다 했다.
“아부지가 뭔 사업을 하시다가 1950년대에 쫄딱 망해가지구, 그 담부터는 가축 장사를 허셨어요. 소 장사, 돼지 장사. 젤 핫빠리 직업이지유. 그걸 가장 하찮게들 봤는디, 그래서 밥만 먹고 살았는디, 그래도 재미있었지유 뭐.”
그의 아버지는 부지런했다. 자전거를 타고 하루 50리, 70리 길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지가 가끔 공연할 때 하얀 두루매기 입고 중절모 눌러 쓰고, 자전거 따릉따릉 하믄서 무대에 오를 때가 있어요. 다 아부지 생각 나서 그러는 건데, 참 목가적이고 좋잖여유.”
어린 시절 그는 모범생이었다. 하나 하라면 꼭 그것만 하는 착한 아들.
“아부지가 농악을 치셨시유. 광천 쪽에서는 우리 동네 농악대가 젤로 쎄거든유. 아부지가 장구를 허셨는데 그게 전 되게 자랑스러웠시유.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걸립이라 해서 하루 종일 마을을 돌거던요. 그걸 매일 쫓아다녔는데 동네 애들 중에 거기 취미 있는 애는 지밖에 읍었시유.”
동네에서 신망 받던 아버지는 썩 훌륭한 장구잽이였다. 그래서일까, 그가 아주 풍류길로 나서마 했을 때도 아버지, 어머니는 “잘 되았다” 박수를 쳐주었다.
“우리 부모님이 신명 있는 분들이셨거든유. 지가 잘 노는 게 그냥 좋은겨. 우리 엄마는 그러잖여요. ‘점을 봤는디 니가 전생에 기생이었디야’. 그 날 그 얘기를 들으믄서 ‘그려, 나는 어릿광대다. 넘들 앞에서 참 즐겁게 해주고 그러는 게 내가 세상에 난 이치고 이유다’ 그렇게 생각을 확실히 가졌지유.”
아버지는 맏아들을 무척 예뻐했다. 초상집, 잔치집 할 것 없이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인사를 시키곤 했다. 장사익은 그런 과정을 통해 “어른헌티 인사하는 법이라던가, 초상 치르고 밥 먹는 예절이라던가” 그런 것들을 아주 제대로 배웠다 했다.
 
장날이면, 한 서너 시쯤 장이 파하는데, 남동생하고 저하고 마을 어귀 다리목에 서서 아부지를 기다려요. 그럼 아부지께서 술이 얼큰해가지고 기분 좋게 오시거던요. 동생이랑 양쪽 손을 꼭 잡고 그 200미터, 300미터 들길을 걸으며 아부지 좋으신 말씀을 가만가만 듣는 거예유. 그 두꺼운 손, 가축 냄새, 술 냄새…. 아부지가 내 쪽말고 동생 쪽만 보고 얘길 허시면 얼매나 서운한지. 고래 같구 태산 같은 아부지…. 그 때 아부지헌테 배운 것이 살면서 아주 큰 힘이 됐시유.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유.”
봄이면 개구락지 울어대는 둑방길에 앉아 흰 돌로 땅에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찰랑찰랑한 논물 위로 벚꽃잎이 우수수 내려앉는, 그 풍경 속에서 클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 했다.
“왜요, 일도 많이 했지요. 똥지게도 지고 모도 심고 두레 일도 나가고. 그래두 싫단 말은 안 했어요. 장남이잖여유.”
 

 

 

생뼈를 만지듯 절실한 리얼리티
초등학교 5학년 때 웅변을 시작했다. 발성이 좋아야 한다기에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비 오는 날만 빼곤 매일 뒷산 중턱에 올라 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가 고지식혀가지고, 한번 해야 헌다 하면 끝까지 혀야허거던요.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 날도 가차없이 가는 거여. 그때 목청 틔운 게 여적 오는 거예유.”
중학교 시절은, 그의 말대로라면 “국민핵교 때처럼 고지식하지는 않았다.”
“국민핵교 때는 공부를 제법 혔는디 중학교 때부터는 50명에 20등 안짝이나 할까…. 그때 동네서 태평소, 그러니께 쇄납을 잘 부는 이가 있었는디, 그 분이 꼭 노을 지는 저녁만 되믄 뚝 끝에 앉아 태평소를 부는 거예유. 그 소리를 지만 그렇게 열심히 들었시유.”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선린상고로 진학했다. 대학은 생각지도 않았다. 취직해 서울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출세라 생각했다. 은행원이 됐으면 했다. 고교 시절 내내 자취집과 학교 사이만 왔다갔다했다. 술도, 담배도 배우지 않았다. 고향 떠나올 때 아버지 당부를 틀림없이 지켰다.
“지는 술 담배 안 먹어두 재미있시유. 사람들은 꼭 술 빌려서 즐기려구 하는디, 지는 안 먹어도 잘 놀아유. 친구들이 아주 제껴놨어. 군대 다니면서도 담배 주면 사탕이랑 바꿔 먹고.”
하나 특별한 것이 있다면 노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었다. “너 참 노래 잘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게 됐다. 가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새 꿈이 생겨났다.
“에이 그래도 멍청했지유. 강단두 읍구. 그냥 눈에 안 띄는 애였어요. 그러니 세상 이치가 참 오묘하지요. 꽃도 필 때가 다 따로 있잖여유.”
고등학교 2학년 때 취직이 됐다. 보험회사의 내근직 사원이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서울 낙원동 음악 학원에서 가수 수업을 시작했다.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예를 들어 ‘가슴 아프게’다, 그럼 이 노래 하나를 가지고 1주일을 연습혀유. 그렇게 한 3년 하니 제법 기초가 탄탄하지 않겄어요? 지가 음반 낼 때나 공연할 때, 앞서 반은 의미 깊은 노래로 좀 무겁게 가고, 뒤로 가면 꼭 옛날 가요 불르믄서 속풀이를 허는디, 젊은 시절 갈고 닦은 그 공력이 엄청 도움이 되지유. ‘동백아가씨’고 ‘봄비’고 ‘대전블루스’고, 세월 흐르는 동안 국악 산조처럼 농익은 내 노래가 돼 버렸거던요. 새 생명을 넣는 거지유, 내 호흡으로.”
아닌게아니라 어떤 노래든 그가 부르면, 이 노래가 그 노래였던가 고개 갸우뚱거려질 만큼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감성으로 가슴을 친다. 장사익은 이에 대해 “정말 그 노래는 내 노래, 새 노래이기 때문”이라 답했다.
“세상에는 노래를 위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구, 또 무슨 운동이나 그런 일의 수단으로 쓰는 사람두 있어요. 지는 지 느낌대로 불러요. 세상에 마흔일곱 먹어 노래 시작한 가수가 몇이나 되겄시유. 다른 가수들이 노래를 위한 노래를 한다면은, 지는 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경험해온 여러 것들, 내 인생 얘기를 풀어낸다 하는 심정으루, 증말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아 0.001초 절박하게 불러유. 그냥 유명 가수가 박자 맞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께 단어 하나하나에 엄청난, 생생한 느낌과 공력을 담아서, 지 노래에 그런 게 있는 건 사실이에유.”
그의 공연에서 느껴지던 미묘한 아마추어리즘, 분명 매우 세련되고 잘 부르는 노래임에도 생뼈를 마주한 듯 절실하던 그 리얼리티는, 어쩌면 바로 그런 태도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대중 음악은 3분 예술이라고 하잖여유. 그러니께 3분짜리 활동사진 같은 거예유. 끝나고 나면, 뭐였지? 텔레비전에서 요즘 꼬마덜 노래하는 거 보면, 어, 뭐였지? 남아 있질 아녜. 근데 어떤 사람 노래를 들으면 나랑 일치하는 거, 그래, 바로 저거여, 저건 내 얘기여. 같이 울고 같이 막 감동하면서, 맞아, 내 사는 재미가 바로 저것이여. 지는 그런 노래를 부를라고 하는 거지유.”
 
“생각이 날개를 타고 돌아다니는겨”
직장 생활 3년 만에 군대에 갔다. 문선대에 배치돼 노래를 했다. 남진, 나훈아 노래를 너무 기막히게 부르는 선배가 있어 언감생심 그 쪽으로는 욕심을 낼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 막 등장한 ‘모던 가요’ 쪽이었다. 이용복, 조영남, 신중현의 노래들을 죽어라 연습했다. 탐 존스나 조용필도 그때 만났다. 결과는 대성공. 그는 문선대가 자랑하는 ‘대표 카수’가 됐다. 그는 이를 두고 “히트 깠다”는 표현을 썼다.
“군대 생활은 그냥저냥 흘러갔지만 제대 후가 문제였시유. 고민이 많았지유, 내가 워디로 가야 헐 것인가. 집안도 가난하고, 성격도 소심하고, 막상 가수 길로 나서자 하니 제약이 많더라구유. 무엇보다 가수 도전할라면 돈이 있어야 하는디, 장남이라는 게 지 좋은 거 헌다고 논 팔고 집 팔 수는 없잖여유.”
직장 생활 열심히 해 맏아들 노릇 제대로 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봤다. 군대 가며 휴직한 전 직장으로 복귀하려 했으나 회사 주인이 바뀐 바람에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그는 “거기서부터 내 인생이 꼬였다. 그 직장만 놓치지 않았으면 가수 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가 1년 남짓 근무했을까, 1차 석유 파동이 터졌다.
“내 잊어버리지도 않어요. 1리터에 12달러 하던 석유가 삽시간에 24달러가 돼버렸어요. 그 때문에 지 모가지가 날라가버렸잖유. 고등핵교만 나왔으니께. 진짜 좌절했고 그담부턴 살기가 참말 힘들었구만유.”
이후 20년 세월은 방황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회사도 여러 곳 다녀보고, 친지 일도 도와보고, 자영업에 회사 운영, 노점 비슷한 것도 다 해봤다.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야간대학도 다녔다. 하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었다. 결혼을 했고 아이들은 커가는데 살림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내리막길이었다.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 / 우리는 늘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 / 등 기댈 벽조차 없다는 생각으로 / 나는 술잔에 떠 있는 한 개 섬이다 / 술 취해 돌아오는 내 그림자 / 그대 또한 한 개 섬이다’(신배승 시, 장사익 곡 ‘섬’)
“지 성격이 자발머리없어 그런가, 일체 거짓말 안 하고 진짜 열심히 사는데도 뭐가 잘 안 되는 거예유. 그나마 좀 안정적이었던 게 금성알프스전자라고 거기 영업부 다닌 건데, 5~6년 하고 나니 지방 발령이 나서 더 버티기가 힘들드라고. 지 이름이 생각 사(思)에 날개 익(翼)자잖여유. 늘 생각이 날개를 타고 돌아다니는겨, 내리지 않고. 나도 몰르게 그러고 살았던 거예유….”
그는 직장생활에 잘 맞는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전자회사 영업직이면 기술도 좀 알고 해야 허는디 지는 맹탕이구, 그저 연구실이나 어디 가서도 순 기냥 인정으루, 그쪽에서 오히려 지를 갈켜주구 감싸주구…. 이성이 아니고 감성적으로다가 살다 보니께 꼭 부품 중에서 뭘 하나 빼먹고, 그러다 보니 납품 기일두 어기구. 하여튼 아주 성실하게 고지식하게 산다 했는데두 뭐가 자꾸 꼬이고 그랬시유.”
게다가 속 맘 못 숨기고, 융통성 없고, 술 실력까지 형편없었으니 동료들 사이에서라면 몰라도 상사 예쁨 받기가 쉬웠겠는가.
“그래도 지 가장 친한 친구들이 옛 회사 동료들이예유. 내 옛날을 속속들이 알고 그렇게나 친하게들 지냈으니께. 아무래두 노래 불른 담에 만난 사람들은 뭔가 계산이 있고 그렇잖여유. 근데 그때 친구들은 허물 없구 속 편하구….”
 
끝내 놓지 않았던 음악의 끈
1984~86년에는 서울교대 뒤에서 독서실을 운영했다. “진짜 열심히, 아주 열심히”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지가 참말 성심성의껏 뒷바라지를 했거던요. 1년에 S대를 5명씩 보내기도 했어요. 근디 3년이 탁 되고 보니, 이러다간 아주 꼬마 대장이 될 것 같어. 이건 아닌데, 딴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독서실 관두고 쬐끄만 무역회사를 차렸지유.”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다. 150석이 늘 꽉 차기에, 옳다구나 싶어 100석을 더 만들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그는 “원래 그 동네 수험생 수가 150명이 다였나봐유” 하며 허허 웃었다.
지인들과 어렵게 차린 무역회사 역시 잘 되지 않았다. 회사 문을 닫고 1년을 놀았다.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다 싶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그가 안쓰러웠는지, 카센터를 하는 매제가 ‘사무장’ 자리를 마련해줬다. 손님들이 오면 차 대주고 커피 타주고 수다도 떨어주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1990년에 시작해 3년을 그리 살았어요. 말이 사무장이지 직원 서너 명 있는데 그거 뭐…. 매달 50만원, 60만원. 그것도 황감하고 매제헌테 엄청 미안했시유. 제 집에 갖고 갈 것 떼서 지헌테 주는 상황이었시니께.”
당시 그의 막막한 상황을 엿보게 하는 노래가 있다. 정성균 시에 그가 곡을 붙인 ‘귀가’다.
‘기진한 몸 텅 빈 가슴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 부스스 잠 깨어 강아지들처럼 기어나오는 / 아이들을 보고야 텅 빈 가슴이 출렁 채워집니다’
그가 꼭 그랬다. 매일이 까맣고 힘에 겨웠다.
“이것을 어찌 산다고 헐 수 있겄나…, 그러면서도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다 하니 오히려 평정이 되더라구유. 1992년 말, 그러니께 한 12월20일 그쯤 돼서 새 결심을 했어유. 그려, 내가 입때껏 40년 삶을 살아왔는디,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냐. 밥만 먹고 똥만 싸고, 기차 타고 마냥 어디로 떠다닌 거여. 좋다, 진짜 내가 3년만 아주 죽을힘을 다해 살아보리라. 그때 생각난 게 태평소였어유.”
당시 이미 그는 국악판에서 제법 이름 알려진 연주자였다. 생활에 쫓기면서도 틈틈이 공부를 계속한 덕분이었다. 그가 처음 국악을 시작한 것은 1980년. 산다고 살아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에게는 탈출구가 간절히 필요했다.

“많이 힘들었어유, 마음적으루. 근디 어린 시절 태평소 소리가 막 몸 속에서 나는 거예유. 아, 그 소리를 좀 배우자, 허고 있는데 전봇대에 붙은 단소 강습 포스터가 보이데요. 옳다구나 싶어 공부를 시작했지유.”

 

 

 

태평소에 한 몸 맡기고

1년 동안 단소를 배우고, 이후 5년 간은 피리를 익혔다. 1986년부터는 태평소를 불었다. 선생님에게 사사받은 기간은 3개월 남짓. 나머지는 잘 분 소리 듣고 또 들으며 독학하다시피 정진했다. 질곡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끝내 놓지 않았던 음악의 끈이 그를 마침내 새 삶의 지평으로 인도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했었나봐유. 그 둘이 전혀 맞지가 않았던겨. 그 와중에도 지는 음악을 버리지 않았거던요. 힘들고 힘든 인생도 다 그놈으로 달래가믄서.”
그는 마흔 넘어 내린 자신의 결단에 대해, 아무것도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기득권 있는 사람은 힘들지, 더 힘든 거여. 윷놀이 헐 때 넉 동이 다 잡혔어요. 그러고 나면 이제는 기냥 막 가게 되잖여유. 더 내려갈 땅이 없다, 그게 그런 거여. 그때 젤로 중요헌 게, 큰 선생님덜 하시는 말씀 있잖여유. 몸을 벗어라, 가볍게 해라, 욕심을 버려라….”
그는 “태평소는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악기”라고 말했다. “농악 할 때 쓰긴 하지만 꼭 필요한 거는 아니거든유. 그래도 한번 소리를 내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지요. 또 즉흥적이고 지 생각대로 요리할 여지가 많구유.”
작심하고 달려들면 밥은 먹고 살지 않을까 싶었다. 1993년 새해가 열리자마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물놀이 대가 이광수, 김덕수씨 등에게 “시켜만 달라, 따라다니게만 해달라”고 졸랐다.
“아부지가 시골서 쌀은 보내니 그냥 먹고만 살았지유. 그때 생각이, 한 해에 35% 이상씩만 목표를 달성하면 되는 거여. 결심 단단히 헌 게 결실을 볼라 그랬는지 자꾸 상도 받게 되고 찾는 사람들도 많아지구. 노력한 보람이 있었지유.”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으로 장원을 수상했다. 같은 해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는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도 ‘금산농악’으로 또 장원이 됐다. 어느새 그는 태평소에 있어서만큼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명인이 되었다.
1993년 대사습놀이는 그에게 국악 연주자로서의 자신감을 심어준 동시에, 시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우연히 금산좌도시인동호회원들의 모임에 갔거든요. 거기서 시집 몇 권을 선물로 받았시유. 읽다 보니 저도 모르게 노래가 툭툭 튀어나오드라구유. 시인을 보고 원래 ‘노래한다’ 허잖여요. 딱 그 말이 맞드라구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이 ‘귀가’ ‘섬’ ‘꽃’이다. 양해남 시인의 시를 빈 ‘꽃’은 이런 노래다.
‘나에게 꽃이 있었지 / 어느 별 어린 왕자처럼 / 매일매일 물을 주고 / 항상 바라봐줘야 하는 / 꽃 한 송이 있었지’
같은 해 그는, ‘장사익 마니아’들이 ‘찔레꽃’ 다음으로 좋아하는 노래 ‘국밥집에서’를 만들었다.
“인사동에서 시 쓰는 친구눔 하나를 만났는데, 이노무새끼가 아주 그지여. 그눔이랑 들어간 술집에서 누가 벽에 연필로 좌악 옮겨놨드라구. 읽으며 가슴이 먹먹했지요. 바로 지 얘기였어유.”
‘노래를 부른다 / 허리가 굽은 그가 탁자를 타닥 치며 /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가 / 희망가를 부른다 / 이마의 깊은 주름은 세상을 덮고 / 눈길 머무는 나를 본다 / 그렇다 / 저 노인은 가는 길을 안다 / 끝내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다’(최산 시, 장사익 곡 ‘국밥집에서’)
 
이렇게 그의 노래는 모두 시를 바탕 삼고 있다. 그가 직접 가사를 쓴 몇몇 곡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시다. ‘1년 가야 책 한 권 안 본다’는 그가, 사실은 가장 많이 읽는 책이 시집이다. 신문을 읽다가도 맘에 번쩍 띄는 시가 있으면 잊지 않고 오려두었다 읽고 또 읽는다. 그러면 그냥 운율이 붙고 곡조가 슬슬 따라나온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쓴 곡들에 대해 ‘작곡가 누구’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몽땅 그저 ‘장사익 엮음’이다. 하늘 아래 다시없는 새 곡조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세상 어딘가를 휘휘 떠돌던 한 노래가 좋은 시를 만나, 알아주는 풍류객을 만나 소리 되어 나오는 거라고, 그는 그리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쓴 거는 아니어도, 어떤 시를 읽으면 아 저것이 바로 내 마음이다, 내 인생이다 하는 것이 있어요. 그럼 그건 내 시지요. 그냥 노래가 되는 거예유.”
 
 
‘오체투지’의 강렬한 공양
그래서 그는 노래를 만들 때 악보를 적지 않는다. 그냥 속에서 나오는 대로 흥얼거리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함께 공연하는 연주자들 앞에서 몇 번이고 불러본다. 그는 화성이니 음정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그 모두 서양식 규칙이 아닌가. “누구나 똑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지는 그런 게 아니라 더 원초적인거, 왜 우리 엄마들이 애기 업고 웅얼웅얼 시에미 욕도 하고, 아이고 다리 아프다 푸념도 허고, 그렇게 애환과 눈물이 담긴 노래를 하고 싶어유. 그냥 흘러가면 되는 것을, 조바뀜도 박자 따지기도 필요 없지유.”
예를 들어 ‘국밥집에서’를 보면, 앞머리는 대금산조 풍이다가, ‘희망가’ 부분은 원래 곡을 살리고, 뒷소절로 가면 진도아리랑 가락이 굽이굽이 풀어져나온다. 이를 두고 장르를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저 한 남자의 신산한 일생이다. 연극 같은 노래다.
“지 노래는 박자 없이 호흡으로 가유. 그렇게 해야 노래에 담긴 메시지가 고대-로 전달돼요. 가사랑 감정이랑 호흡이랑 표현이 꼭 마치맞게 일심동체로 움직이니께. 봄여름가을겨울을 봐유. 그게 어디 딱딱 끊어져 찾아오든감유. 사람 맥박은 또 워뗘유. 기분 따라 달라지잖여유.”
시 고르기부터 시작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노래에서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다. 장사익은 그 메시지를 가장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죄 한 지점에 모아 맞춘다. 가사, 감정, 표현, 들숨날숨을 관객 앞에 한덩이로 묶어 던지는 ‘오체투지’의 강렬한 공양이다.
“그래서 지 공연 보믄 반주가 간단하잖여유. 기타, 모듬북, 때에 따라 사물놀이, 트럼펫, 해금. 전부 즉흥 연주가 가능한 것들이예유. 또 우리끼리 참말로 호흡이 잘 맞으니께. 우리는 악보 보고 반복해 연습허고, 그런 것은 잘 안 혀요. 그냥 서로서로 보듬어가믄서, 목청이 좀 딸리면 기타가 받쳐주구, 기타가 또 딸리면 북이 우다다다 힘 넣어주구. 그렇게 한데 어울리면서 평생 갈 거예유. 참말로 좋은 인연이지요.”
흔히 ‘장사익 사단’으로 불리는 일단의 연주자들은, 사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 명성을 쌓은 장인들이다. 기타리스트 김광석은 옛 ‘들국화’ 멤버다. 자기 이름으로 창작 음반을 내고 개인 콘서트를 열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 3000장 이상의 음반에 세션으로 활동한, 가수들이 새 판을 낼 때마다 꼭 ‘모시고’ 싶어하는 이름난 기타리스트다. 모듬북을 치는 김규형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지도위원이다. 오정숙, 김동준, 김명환, 정화영, 김청만의 문하에서 고법을 사사했다. 제6대 ‘품바’로 활동한 고수이자 소리꾼이다. 트럼펫과 해금은 재즈연주가인 최선배, 국립국악관현악단 소속 김은영씨가 맡고 있다. 사물놀이패인 ‘노름마치’도 800여 회의 국내외 공연으로 이름 높은 차세대 대표주자다.
이들을 한데 묶는 건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잘 맞는 짝이라는, 함께 어울릴 때 가장 흥이 나고 좋은 소리가 뿜어져 나온다는 확신이다. 장사익은 공연중 연주자들이 자신의 기량과 특색을 한껏 뽐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실히 보장해준다.
그에게 또 한 사람 중요한 이는 ‘무박(無拍)’의 개념을 처음 심어준 타악기 주자 김대환이다.
“그 형님이 어느 날 지헌테 ‘산토끼’를 박자 없이 불러보라고 시켰어요. 그래 박자 무시하고 부른다고 불렀는데, 아 대뜸 ‘너 속으로 세고 있잖아’ 하시는 거예유. 그려! 이거구나! 무릎을 탁 쳤지요.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좋은 일 있으면 소리 지르고, 그렇게 기분 가는 대로 맘 따라 소리내다 보면 그게 진짜 노래 아니겄어요?”
 
실제로 그의 노래는 딱딱 박수치며 따라 부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 어깨를 으쓱이거나, 허리를 살살 흔들어대거나, ‘얼쑤’ 무릎을 두드리며 몸 자체로 운율을 타야 더 신명이 난다. 장사익의 노래에서 참 자유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노래가 맘과 더불어 이렇듯 몸마저 폭신폭신 풀어주기 때문일 게다.
이제 다시 그가 가수 된 사연으로 돌아가 보자. 1994년 여름이었다. 태평소 주자로 나선 지 1년 반이라, 공연 후 뒤풀이 자리가 자연스런 일상이 됐다. 술 한 모금 못 넘기는 그이지만 무대보다 신명나는 그 자리를 마다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를 원했다. 그는 이미 소문난 최고의 ‘뒤풀이 카수’였다.
“‘봄비’ 그게 18번이구, ‘님은 먼 곳에’ 그것도 자주 불렀지유. ‘열아홉 순정’ ‘동백아가씨’도 불르구, 아주 끝내줬어요.”
간혹 직접 만든 노래들도 섞어 불렀다. 그걸 들은 ‘재야 피아니스트’ 임동창씨가 “판 한번 제대로 벌여보자”는 권유를 했다. “싫다, 이제 와서 뭔 소용이냐” 거절을 했는데도 집에까지 쫓아와 “꼭 해야 한다”고 질리게 졸라댔다. 이어 타악주자 김규형씨가 합류했다.
 
25년을 돌아 가수가 되다
“그래 결국 노래를 하게 됐지유. 1994년 11월, 신촌 예극장에서 첫 공연을 혔어요. 그냥 아는 사람덜 알음알음 연락혀서, 그 중엔 표 산 사람도 있구, 안 산 사람도 있구. 근데 100석 자리가 다 차고 한 300명은 서서 본 거예유. 반응이 너무 좋아 지들이 더 깜짝 놀랐지요.”
단 한 차례의 공연만으로도 그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정말 할 일이, 하늘이 날 세상에 낸 뜻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시유. 드디어 갈 길을 찾은 거잖아유. 고등핵교 졸업허구 뺑뺑 돌아 여기까지 온 거지. 그러고 보니 지가 몸은 딴 짓을 해도, 늘 노래 속에 살았던 것 같드라구유. 카센타에서 일할 때도 손님이 싣고 다니는 테이프들을 보면 그 사람 인생이 한눈에 쫙 보여요. 공부는 얼마나 했나, 나이는 어떤가, 성격은 어떠한가. 얼매나 재미있어유.”
그에게, 그토록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누구 눈에도 도드라지지 않고 특별히 챙김 받을 것 없는 ‘민초’로 살아가는 삶이 못내 갑갑하지는 않았냐고 물었다. 예술가로서의 끼를 타고난 사람은 어려서부터 주목받는 삶에 익숙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에게선 ‘특별 대접’을 받아본 사람다운 면모가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지는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시유. 평범하니 안 하니 그런 말 자체를 할 필요가 없는 게, 지는 평범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평범혀유. 물론 무대에 서면 100%, 200% 특별한 노력으로 애를 쓰지만, 그래서 무대 위의 나는 뭔가 특별해 보일지 모르지만, 거기서 내려오면 지는 정말 암것두 아니예요. 언젠가 한 ‘운동권 가수’가 그러드라구유. ‘나는 15년 동안이나 현장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지금의 자리를 다졌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당신이 어떻게 한순간 민중음악의 대안이고 상징이 될 수 있느냐’. 그래서 지가 말했지요. ‘난 모른다, 그러나 뭔가 있다면 그건 내가 정말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거다’라구유.”
그는 “원래 그렇다” 하지만, 사실 평범함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음악에 임하는 그의 보루이자 삶의 핵심이다. 이미 유명인이 된 그가, 그 유명세를 활용하려 마음먹으면 누구와도 교통할 수 있고 마음껏 잘난 체도 할 수 있는 그가, 굳이 주목받지 않는 삶을 살려 애쓰는 것은 청중과의 거리낌 없는 어울림,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평범함은 내 노래의 보루”
“지가 이렇게 티샤쓰 입구 추리닝 입구 밖에 나가믄 사람들이 아무두 몰라봐유. 얼매나 행복한지. 이게 장사익이다 할라 치믄, 개량 한복 쫙 빼입고 유명한 사람들이랑 쓱쓱 어울리고 다니믄, 지가 아무리 텔레비전 안 나갔다 해도 몇 사람은 알아보지 않겄어유? 그런데 그러면 안 되거든요. 초심으로 가야지유. 관객들하고 똑같은 키, 똑같은 감정으루 똑같이 울고 웃고. 가장하면 안 돼유. 진짜 모습이 그래야지유.”
그렇다면 좀더 많은 사람에게 내 노래를 알리고 싶다는, 더 많은 음반을 팔고 싶다는 욕심 같은 것도 없을까.
“어쩜 욕망 있겄지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노래는 지 혼자 하는 것이지 누구한테 알리고 자랑할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거던요. 열 명이 듣건 백 명이 듣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어요. 나는 오히려 한 사람만 앞에 놓고 불렀으면 좋겄어.”
그는 노래가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나훈아계 알어유? 아줌마들이 그걸 한다는 거예유. 1년 동안 한 달에 만원, 이만원씩 모아서 나훈아 디너쇼 하면 그걸 보러 가는 거예유. 얼매나 멋있어유. 한 사람의 노래가 누군가의 1년 시름을 한번에 덜어주다니. 공연 끝나고 음반에 싸인 해주다 보믄 우리 엄마가, 우리 친구가 지금 암 투병중인데 당신 노래로 힘 주고 싶으니 꼭 그 사람 이름 써달라고 신신 당부허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뭐겄시유. 노래의 힘, 공감의 힘 아니겄시유?”
가장 순정한 공감을 위해 그는 한번 노래할 때마다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를 쥐어짠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를 만난 이들은 볼 때마다 주름이 깊어지고 몸피가 줄어든다며 걱정이 대단하다. “어쩌겄어요. 그러질 않으면 똥 싸고 밑 안 닦은 것처럼 개운치가 않은디.”
 
“생산적 슬픔 아세유?”
예극장 공연이 있은 얼마 후 1집 음반 ‘하늘 가는 길’을 냈다. ‘찔레꽃’ ‘귀가’ ‘하늘 가는 길’ 같은 창작곡 외에 ‘님은 먼 곳에’ ‘빛과 그림자’ ‘열아홉 순정’ ‘봄비’까지 불러 넣었다. 그의 꽉 차 찐득한 목청, 장르를 구분하기 힘든 대안적 음악세계는 곧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1996년 ‘자유’ 공연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군중 앞에 섰다. 가요평론가 강헌씨의 표현대로라면 ‘노래가 마악 끝났을 때 대극장은 바늘이 떨어져도 들릴 정도로 순간적인 정적이 감돌았고, 약 1초 후 지붕을 들썩이는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오는’ 감격을 경험했다. 무대 가수로 본격 데뷔한 것이다.
그러나 2집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1집의 큰 성공을 함께 이끌었던 임동창과 음악적 결별을 한 것이다. 둘이 함께 하기엔 임동창의 피아노가 너무 거셌던 걸까. 그렇게 나온 2집은 1집만큼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아버지의 병이 깊어진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는 폐암으로 거듭 밭은 기침을 토해내는 아버지 곁에서 표제작 ‘기침’을 만들었다.
‘돌아누워도 돌아누워도 찾아오는 / 환장할 기침은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 밥그릇의 천길 낭떠러지 속으로 / 비굴한 내 한몸 던져버린 오늘 / 삶은 언제나 가시박힌 손톱의 아픔이라고 / 아무리 다짐을 놓고 놓아봐도 / 별자리마저 제집을 찾아가는 새벽녘까지 / 나의 마른 기침은 멈출 줄을 모른다’(신배승 시, 장사익 곡 ‘기침’)
“녹음을 했는디 너무 아닌 거예요. 세상에 내놓을 수가 없어 방구석에 처박아놨지유. 근데 가을 낙엽 지는 걸 보믄서, 부족하고 형편없지만 그래도 저게 내 모습 아닌가, 개칠해서 내놓으면 뭐 또 그리 좋겠는가…. 그런 생각에 그냥 부끄런 줄 알면서도 내놨시유.”
3집 ‘허허바다’는 장사익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음반이다.
‘파도를 보면 / 내 안에 불이 붙는다 / 내 쓸쓸함에 기대어 / 알몸으로 부딪치며 으깨지며 / 망망대해 하이얗게 / 눈물꽃 이워내는 파도를 보면 / 아, 우리네 삶이란 / 눈물처럼 따뜻한 희망인 것을’(허형만 시, 장사익 곡 ‘파도’)
그가 부르는 ‘파도’는 정말 듣는 이의 가슴에 불을 붙인다. 쓸쓸함에 기대어 희망을 부를 수밖에 없는 인생살이를 아프게 눈물나게, 그러나 청승맞지 않게 다독여준다.
얼마 전에는 4집 ‘꿈꾸는 세상’을 냈다. ‘아버지’란 곡도 담겨 있는 이 음반은 앞의 세 것을 합친 것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대꽃 피우러 1백년 길을
너무 슬픈 노래만 부르는 것 아니냐고 하자, 그는 “내가 할 몫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사람 열에 아홉은 헷갈리며 살어유. 사는 게 참 퍽퍽하잖여유. 그런 사람들 맺힌 속을 노래로 풀어주고 싶은 거예유. 즐거운 사람헌테는 즐거운 노래를 해줘야 기분이 더 좋아지는 거고, 슬픈 사람헌테는 슬픈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상수라고 지는 봐유. 왜 시집살이 독허게 헌 며느리들이 시어무니 초상 치르며 되게 쎄게 울잖여유. 그럼 동네사람덜이 그러지유. 저 집 며느리 참 곡 잘허네, 쌍 꺼. 며느리 입장에선 뭐것시유. 시어매 돌아간 것이 슬퍼 우는 게 아니라 지 설움에 겨워 한바탕 풀어내는 거지유. 그런 게 바로 생산적 슬픔 아니겄어유?”
나고 자라 짝 만나서 애 키우다 또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유전 갈피갈피, 그의 노래에 다 들어 있어 와달라는 자리가 적지 않다.
“초상집에 가면 ‘질 땐 지리 뚝 뚝 / 필 땐 피어 하늘 한 번 보고 / 은근한 향기 바람에 날려보내고…’ 하는 ‘낙화’를 부르구유, 혼례식에 가면 ‘나 무엇이 될까 하니 / 그리운 그대 꿈속까지 찾아가 / 사랑하는 그대 귀 씻어주는 빛 고운 솔바람소리…’ 하는 ‘나 무엇이 될까 하니’를 부르구유.”
이렇게 말하는 그도 어느새 육십이 낼모래다. 인생사 구비구비 멀고 먼 길을 혹은 웃으며 혹은 흐느끼며 예까지 왔다. 1998년, 2001년에 아버지, 어머니를 떠나보냈고, 목원대 국악과를 나와 국립국악관현악단 피리 주자가 된 큰아들은 국악 하는 좋은 짝 만나 잘 살고 있다. 역시 피리를 전공한 둘째 아들 하나 데리고, 백만불짜리 창이 있는 마루에서 뒹굴거리며, 그는 종일 아내와 친구와 끝내주게 잘 놀 궁리를 한다. 풀꽃을 보고 별을 본다.
‘여기서부터, -멀다 / 칸칸마다 밤이 깊은 / 푸른 기차를 타고 /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 백년이 걸린다’(서정춘 시, 장사익 곡 ‘여행’)
대나무는 백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다 했나. 그려, 뭔 말이 더 필요하겄능가. 장사익은 매일 기차를 탄다. 핏줄 선 목청으로 대꽃 피우며, 간난신난 1백년 길 춤추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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