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기다림과 여행하는 것이다♡
The Best of~~ 신중현 본문
국내 대중 음악사에서 록의 대부라 불리는 신중현은 우리 음악의 흐름 가운데에서, 최초로 록을 주무기로 메인스트림을 집권한 인물이며 부단한 실험과 노력으로 수많은 히트곡을 제조한 시대의 작곡가이다. 어린시절부터 기타 교본을 가지고 독학하며 AFKN의 음악을 섭렵했던 신중현은, 음악 학원의 강사를 하다가 미8군 무용수의 소개로 미8군 무대에 서게 된다. 이 때부터 그는 재키, 히키, 스꼬시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이에 자신감을 얻어 여러 그룹을 조직하며 본격적인 록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의 기타는 미군 병사들에게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를 떠올리게 했으며 고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었다. 신기에 가까운 기타 솜씨로 미8군내의 영자신문과 잡지에 대서 특필되며 영내에서는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던 그는 쇼 무대의 선배들과 함께 (히키-신 기타 멜로디 경음악 선곡집)이라는 최초의 앨범을 내기도 하고, 첫 기타 독주회를 열어 절정의 인기를 과시한다. 이어 이화여대 교수 등을 지낸 이교숙에게 작곡법을 사사 받은 신중현은 1962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그룹으로 기록되는 애드포(Add4)라는 록그룹을 결성한다. 이 팀은 잦은 멤버 교체를 겪으며 별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최근에 김건모에 의해 리메이크 된 '빗속의 여인'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으며 이 음반에는 장미화의 노래가 실려있기도 하다. 애드포를 이끌고 음악 감상실에서 연주하던 그는 그룹 블루 리본 출신의 드러머와 결혼을 하고 팀을 해체한다. 그리고 다시 미8군으로 복귀해 조우커스(Jokers)라는 그룹을 만들었다가 와해된 뒤 브루즈 테트(Blooz Tet)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이 팀은 미8군 전속 밴드로 록은 물론이고 재즈와 관련된 음악을 연주했다. 하지만 미8군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신중현은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이용해 월남으로 갈 준비를 하고 향후에는 유럽으로 진출할 꿈을 키운다. 그리고 월남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을 의미하는 기념음반을 배인순, 배인숙 자매에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 음반에서 '님아'와 '떠나야 할 그 사람'이 크게 히트하고 트로트 주도의 가요 시장에 록음악의 한 줄기 빛을 내리 쬐었다. 신중현은 우리 음악 시장에 대한 가능성을 감지하고 월남행을 포기했으며 신중현 사단이라는 스타 시스템을 온 누리에 퍼뜨리기 시작한다. 그는 이후 장미화, 박인수, 이정화, 김추자, 펄 씨스터즈, 임성훈, 장현, 바니걸스, 김정미 등의 가수를 슈퍼스타로 만들며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명성을 날린다. 신중현은 수 십 곡에 이르는 히트곡을 제조했으며 트로트와 포크 시장의 틈바구니에서, 뛰어난 시장성을 개척했다. 신중현은 작곡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그룹 활동도 계속했다. 1968년에는 미8군에서 쇼 단체를 이끌면서 덩키스(Donkeys)라는 그룹을 결성했고 소울과 싸이키델릭을 주로 연주하며 '봄비'라는 곡을 타이틀로 첫 음반을 낸다. 하지만 별 인기를 얻지 못했고 해산 후 음악학원을 설립한다. 이어 1970년에는 신중현 오케스트라를 결성한다. 역시 여의치 않았던 그는 이 단체의 해산을 선언하고 제로(Zero) 악단을 만들었으며 한편으로는 퀘션스(Questions)를 이태현, 김대환 등과 결성해 박인수, 김추자, 송만수, 임희숙 등을 배출한다. 신중현 헌정앨범 (신중현작사작곡) 기타연주곡 미8군 무대의 최고 스타 신중현
신중현은 미성년이던 57년에 미8군무대의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보수도 처음 3,000원에서 시작해 서서히 인기를 얻고 62년경 미8군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면서 2,4000원(63년 당시 도시근로자가구의 월평균 가계소득은 5천990원-통계청 자료)으로 올랐다. 활동범위도 미8군 뿐 아니라 국내 여러 라이브 무대를 통해서 신중현이라는 이름을 알렸다. 신중현은 당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서, 작곡가로서 부와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60년대 미8군 최고의 스타였던 신중현의 이력을 통해 미8군의 상황과 그가 대중가요계에 남긴 족적을 살펴보자.
그러나 신중현은 미8군 쇼무대와 '미도파살롱', '은성살롱', '닐바나'를 주무대로 삼아 활동하면서 세계의 음악 흐름을 알게된다. 서서히 실력도 늘고 인기도 올라가 그에게 차츰 기타 솔로연주를 요구했다. 첫 독주 무대였던 60년경의 시빌리안 클럽. 이곳은 미군 정보부 소속의 클럽으로 평상시에도 사복을 입고 다니는 고위층 군인들이 다는 곳이었다.
신중현은 59년미8군에서 함께 일하던 선배들인 더불베이스, 드럼, 색소폰 연주자와 함께 첫 앨범을 내는데 그것이 도레미 레코드회사에서 발매된 '히키-申 기타-멜로듸 輕音樂 전曲集'이다. 여기에는 재즈풍으로 편곡된 동요와 한국 민요가 담겨있다. 1962년 경, 신중현은 한국 최초의 록 그룹 '에드 훠'(Add 4)를 결성 하여 활동했다.(이전에 신중현이 결성했던 그룹이 있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없기에 편의상 한국 최초의 록 그룹이라 칭한다.) '에드 훠'는 활동시기를 라인업에 따라 시기별로 분류되는데, '에드 훠' 초기에는 신중현이 전기기타를, 한영현이 베이스를, 지금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 2명이 리듬기타와 드럼을 연주했다. 중기 '에드 훠'는 전기기타 연주의 신중현, 드러머 김대환, 베이스의 지미와 보컬의 서정길로 멤버가 바뀌었다. 후기 '에드 훠'는 신중현(전기기타), 서정길(보컬), 한영현(베이스), 권순권(드럼)으로 멤버가 바뀌었고 1964년, 엘케엘 레코드사에서 '에드 훠' 음반을 냈다. 이 음반은 한국 최초의 록 음악 음반이다.
'에드 훠' 의 데뷔 음반 초기에는 '에드 훠'가 서울보다 부산에서 인기가 좋아서 부산 제일극장 등에서 공연을 했고 그 후 서울에서도 인기가 높아지자 서울에서도 공연을 했다. 그리고 '에드 훠'는 KBS-TV에도 여러번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 1965년에 해산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신중현은 1962년경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교숙에게 작곡, 편곡 등을 배우며 음악이론도 충실히 쌓아갔다. 70년에 그는 엄청난 음악 작업을 했다.1970년 초 '제로'(Zero)악단, 그룹 '퀘션스'를 결성했다. 그룹 '퀘션스'에서 신중현은 리드 기타를, 김대환은 드럼을, 이태현은 베이스를, 김민랑은 오르간을 연주했고 이 그룹에서서 박인수, 송만수, 임희숙, 임성훈 등의 가수가 활동했다. 1970년 초 명동의 '코스모스' 싸롱에 고고 클럽을 개업하기도 했다. |
'음악,영화 > @뮤지션·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Best of~~ 정미조 (0) | 2009.01.28 |
---|---|
The Best of~~ 임희숙 (0) | 2009.01.28 |
The Best of~~ 한영애 (0) | 2009.01.28 |
The Best of~~ 배따라기 (0) | 2009.01.28 |
The Best of~~ 해바라기 (0) | 2009.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