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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기다림과 여행하는 것이다♡

The Best of~~ 한영애 본문

음악,영화/@뮤지션·국내

The Best of~~ 한영애

dhgfykl; 2009. 1. 28. 22:56

 
 
 
 
'59년생 서울 예전 연극과 졸업.
'76 그룹 해바라기 활동후 '86년 여울목으로 솔로 데뷔.

남성 중심적인 대중음악의 한복판에서 목소리로
모든 음악을 제압한 탁월한 가창력의 소유자 한영애.

아무리 훅이 없는 노래라도 허스키한 보컬로 들리게 만드는 주술적인 능력으로
현존하는 여가수중 최고의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다.

트로트와 발라드, 그리고 포크가 대세를 이루던 시대에
적극적인 의미의 음악 활동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만큼의 인지도와 능력으로 혁신적인 음악을 보여줬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를 잘 알 수 있는 곳은 무대이다.
그것이 라이브이건 연극이건, 뮤지컬이건
그녀는 모션과 음악을 잘 합치할 수 있는 이상형으로 인정받고 있다.

1988년 모두가 최고 걸작 중의 하나로 꼽는 2집 앨범에 들어있는
'누구 없소'가 한바탕 인기몰이를 하고 난 뒤
'코뿔소' '루씰'등이 나란히 인기를 얻었다.

그의 팬클럽 이름인 코뿔소란 곡은 그의 본류라고 할수 있는 블루스와 펑크를
기반으로 한 곡으로,
가사가 다소 생경하지만 흥겹게 따라부를 수 있는 즐거운 곡이다. 


 

 
 


1.봄날은 간다 / 한영애


2.어떤이의 꿈 / 봄여름가을겨울


3.골목길 / 한영애


4.구름, 들꽃, 돌, 연인(이광조,이정선,이주호,한영애)


5.사노라면 /윤도현,이승철,리아,한영애


사용자 삽입 이미지

6.여울목(라이브) / 한영애


7.끝이 없는길 / 한영애


8.누구없소 / 한영애


9.루씰 / 한영애


10.커피한잔 / 한영애




11.황성옛터 / 한영애


12.목포의 눈물 / 한영애


13.아쉬움 / 한영애,신촌 블루스


14.옛시인의 노래 / 한영애


15.눈물속에 피는꽃 / 한영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6.조율 / 한영애


17.마음 깊은곳에 그대로를 / 한영애


18.코뿔소 / 한영애


19.타향살이 / 한영애


20.비애 / 한영애




21.위에 곡들 연속듣기
 


 
 한영애는 영혼이 빨려들 듯 묘한 분위기의 카리스마를 풍기는 영혼의 울림을 가진 ‘소리의 마녀'다.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듯 무아지경에 빠져 열창하는 모습은 때론 관능적이고 범접하기 힘든 영적인 이미지까지 내 뿜는다. 결코 인기에만 영합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색채로 폭 넓은 대중성을 확보한 드문 여가수다.

포크로 시작해, 블루스와 록, 그리고 테크노를 거쳐 최근 트로트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 포크 가수 시절엔 ‘한국의 멜라니 사프카'로, 블루스 록 가수로 변신했을 때는 ‘한국의 재니스 조플린'으로 불렸다. 이는 끊임없이 음악적 아이디어를 창출하면서 그 어떤 노래일 지라도 자신만의 분위기로 변색시키는 그녀만의 차별성 때문이다. 한영애는 풍부한 영감 에 끊임없는 노력으로 스스로를 카리스마적인 여성 보컬로 자신을 자리매김 시켰다.

그녀는 음악하고는 무관한 평범한 가정의 2남 2녀 중 둘째로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막연하게 장래 희망으로 의사를 생각했지만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 숫기 없는 보통 아이'였다. ‘왜 아이들이 나를 지휘자로 뽑았는지 모르겠다'고 겸손해 했지만 그녀는 을로초등학교 시절, 교내 합창경연대회 마다 지휘자로 뽑혀 친구들의 합창지도를 했고 국군장병아저씨 위문공연 때도 대표로 노래를 했을만큼 잠재적 음악성이 풍부했던 학생이었다. 서울여중에 입학해서도 튀는 학생은 아니었다.

이 시절, 마음 깊숙한 곳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무엇을 찾고 갈구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꿈의 형태는 아니었다. 서울여고에 진학해서 비틀즈 음악을 간간이 들었던 언니와 집에 있던 라디오를 통해 대중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언니의 제안으로 저금통을 털어서 싸구려 기타를 구입했다. 아버지의 친구 동생에게 클래식 기타를 몇 번 배웠지만 결국 독학으로 기타를 익혔다.

여고 졸업 후 대학입시에 낙방한 그녀는 재수를 했다. 당시는 음반을 틀어주는 음악 감상실 전성 시대. 떼거리로 몰려다니기보다는 혼자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한영애는 주로 신촌 쪽에서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지냈다. “좋은 팝 음악을 들으려고 희귀한 판들이 많은 신촌 쪽으로 다녔어요." 음악을 좋아했던 남자 친구의 소개로 선배가 운영하는 신촌의 한 카페에 자주 놀러 가 음악을 틀고 손님이 없으면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표 의식도 없이 그냥 노래가 좋아서 몇 달 동안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 조금씩 노래 실력이 알려지면서 ‘이상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여자애가 나왔다'는 소문이 났다. 소문을 들은 한 음악 매니저가 카페에 찾아 왔다.

“그 사람을 따라 뭔지도 모르고 친구와 함께 남대문의 프린스 살롱에 가서 오디션 같은 걸 보았어요. 그랬더니 내일부터 당장 나오라고 하더군요." 가수에 뜻이 없어 망설이던 그녀는 남자 친구의 설득으로 업소 무대에 올라 두 달여 정도 노래를 불렀다. 당시 레퍼토리는 김민기, 양희은, 멜라니 사프카 등 포크송 계열의 노래들. 사교적이질 못해 동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노래 부르는 자체만을 즐겼다. 어느 날, 함께 출연하던 개그맨 전유성이 드라마센터에서 여는 자신의 개그 쇼의 포스터를 가져왔다. 허락도 없이 게스트로 이름을 올려 거절도 못하고 노래를 했다. 그 후 구자형, 자룡 형제가 주도했던 ‘참새를 태운 잠수함'에서도 노래를 청해왔다. 당시 프린스는 신인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몇 만원의 월급을 이례적으로 받았다. “'처음 무대에 선 신인으로 월급을 받은 건 네가 첨이다'고 하더군요. 모든 사람이 그때 내가 가수가 되려 한다고 생각했었나 봐요"

명동에서 ‘Time In A Bottle'등 팝송을 노래를 하고 있을 때 이정선과 정성조가 찾아왔다. 이정선은 무뚝뚝하게 노래 평을 해 어린 맘에 기분이 상했다. “이정선씨는 나름대로 노래를 가르쳐주고 싶어서 그랬나 봐요." 오비스 캐빈 앞의 로즈가든은 당시 모든 통기타 가수들에겐 최고의 무대. “재수할 때 아는 카페에서 심심풀이로 노래한 게 전부예요. 혼자 있다가 해바라기에 합류했어요. 그때도 가수를 할 마음은 전혀 없었고 그러다가 연극 쪽으로 갔어요" 명동 카톨릭 여학생회관의 해바라기홀에서 김의철을 통해 버피 세인트 메리라는 인디언 여자 가수의 노래를 접하게 되면서 감명을 받았다.

“자연을 사랑했던 그 여자가 굉장히 크게 보였고 멋있는 여자구나,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죠" 당시 그녀는 C.C.R,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레드 제플린 등 록 음악을 즐겨 들었고 밥 딜런, 김민기의 통기타 음악은 그들의 아름다운 가사를 좋아 했다. 75년부터 나가기 시작한 해바라기홀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열린 발표회 때 김의철의 노래를 주로 연습해서 불렀다. 그때의 노래들은 이정선 작편곡집인 77년의 비공식 1집<어젯밤 꿈/사랑의 바람.지구,1977>에 녹음 수록되었다. 수록곡은 김의철곡 ‘행복을 파세요', ‘촛불을 켜세요', ‘영원한 사랑', ‘어젯밤 꿈' 등. 1집(비공식)을 내고 TBC등 방송 공개 방송에 나가 몇 번 노래했지만 이 음반은 상업적이지 못하는 이유로 정식발매는 되지 못하고 묻혀버려 전설이 된 음반이다. 그러나 이정선이 그렸다는 수채화 재킷은 환상적이었다. 영원한 28 딸기띠로 사는 활화산 같은 무대 위의 여걸

한영애는 베일에 가려진 음반이 많은 가수다. 혼성 포크 그룹 해바라기 활동(1977~78년) 이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데뷔 음반이 세상에 나왔다. 최초의 음반은 76년에 발매된 3인의 ‘스플릿 앨범’(공동 앨범)인 <백호빈·오종국·한영애/사랑의 편지ㆍ힛트>. " 신기하네요. 녹음을 했으니까 나왔을 텐데. 이 음반은 해바라기 전인가요? 왜 녹음했는지 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요." 76년 혼성포크 그룹 해바라기에 합류한 한영애는 이촌동 서울스튜디오 녹음에 참여해 리더 이정선, 이주호, 김영미와 함께 <해바라기 1집ㆍ지구.1977>을 발표했다. 당시 특별한 목표도 없었지만 포크 음악만으로는 넘쳐 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그녀는 77년 12월 창고극장의 '덧치맨'에 출연하며 연극 쪽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77년 비공식 첫 독집 <어젯밤 꿈ㆍ지구>에 이어 78년, 군입대로 이주호가 빠지고 이광조가 가세한 해바라기 2집과 비공식 2집<작은 동산ㆍ1978>을 연이어 발표하는 등 음악과 연극 활동을 병행했다. " 대중적이지 않다며 제대로 판매도 하지 않았던 2집 음반은 노래를 다시 시작하니까 다시 판매를 하더군요. 화가 나서 신세기레코드로 찾아가 판권을 사려고도 했었지요." 비공식 두 음반에 대해 한영애는 "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이정선ㆍ오세은씨의 음반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까지도 앞서 발표한 음반이 늘 부담스러워 존재 자체를 부정해 왔다. "그 음반들을 생각할 때면 태평양 가서 빠트리는 꿈, 마스터 테이프를 찾아 와서 불지르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가 그래도 내 역사인데 싶어, 껴안게 되더군요. 오히려 가수 지망생들이 나의 이런 역사를 보고 데뷔 때 생각 없이 판을 내지 말고 확실한 프로듀서를 만나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통기타 시절 담백한 스타일의 보컬로 자신을 감춘 한영애의 가슴속에는 사실 활화산 같은 뜨거운 감성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79년 말 극단 자유의 배우 시절, 한영애는 카페 '장미의 숲'에서 이영재ㆍ조덕환과 함께 트리오를 구성해 연습 삼아 노래를 불렀다. 당시 레퍼토리는 나중에 들국화 노래로 알려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세계로 가는 기차’ 등. 또한 여의도 관광호텔에서 전인권ㆍ이영재ㆍ권혁수 등이 여자 싱어가 필요하다고 해 잠깐씩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때부터 한영애는 록으로의 음악적 변신을 시도했다. 1983년까지 극단 생활을 하면서 연극에도 어느 정도 한계를 느꼈다.

30세를 넘기면서 자신이 그 동안 느껴온 오랜 갈증의 정체는 노래임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1985년 이정선의 집에 놀러 갔다가 공식 1집 <한영애/여울목.1986>을 녹음하게 되었다. 이 음반은 비공식 2집 제작 때 아픔을 겪었던 오세은이 기획을 했다. 이때 한영애가 가져 온 이영훈의 곡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오세은이 한돌의 곡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당시 퇴짜를 맞은 '사랑이 지나가면' 등은 후에 이문세가 빅히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수록곡 <건널 수 없는 강>은 한영애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정서를 가진, 울부짖는 곡이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시립음악원으로 유학을 다녀 와 86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뒤늦게 입학, 만학의 열정을 불태웠다.

이정선의 기획으로 발표된 프로젝트 음반 해바라기 3집과 엄인호, 이정선, 김현식과 함께 결성한 프로젝트 노래 모임인 신촌블루스의 1집 음반에도 참여했다. 88년에는 히트곡 ‘누구 없소’가 수록된 2집 <바라본다ㆍ서라벌>를 발표했다. 김수철의 도움을 받아 한영애가 처음으로 기획한 이 음반으로 5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빅 히트를 터트리며 비로소 일반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옛날에는 튀는 테크닉이나 성량보다는 화합하며 자제했어야 했어요. 헌데 솔로 2집 낼 때는 절제할 필요 없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노래했어요.

내 뱃속에 이런 소리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면서 소리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지요." 그 해 대구 동아문화센터에서 첫 개인콘서트를 개최한 한영애는 오세은의 4집 '남사당'에 보컬로 참여하면서 국악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92년 처음으로 작곡한 '말도 안돼'가 수록된 3집에 이어 93년에는 당시 사회에 화제를 뿌렸던 '김민기 1~4'에 참여?'기지촌'을 불렀다. 또한 그 해, 63빌딩에서 성황리에 '아우성' 공연을 개최했다. 매니저를 두기 시작한 4집<불어오라 바람아.1995>은 가수에서 아티스트로의 탄생을 외치는 선언 같았다.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작업한 이 음반은 그녀가 가장 애정을 갖는 음반. 97년, 대중 음악 뿌리 찾기라는 화두로 참여한 신중현 헌정 앨범에서는 공연 기획을 맡았다. 99년엔 테크노와 결합한 5집 <난.다>를 발표하며 또 한번 변신을 꾀했다.

이후 열정적인 목소리 뿐 아니라 갖가지 동작과 소품 등 시각을 강조한 다채로운 기획으로 변신하는 이미지를 콘서트 때마다 창출해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KBS 제2FM <뮤직스테이션> 진행자로 변신한 그녀는 작년에는 김포 복숭아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트로트 앨범 으로 또 다시 새로운 기획을 선보였다. 미혼인 그녀는 "남들처럼 사춘기의 방황과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환희와 환상이 깨지는 경험들도 했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삶의 미덕 중 '정직함'에 가장 가치를 둔다. 록과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튀지 않는 형태로 국악기를 접목하는 음악을 꿈꾸는 “ 28살 딸기 띠” 가수 한영애. 끊임없이 아이디어 연구에 몰두하는 그녀의 음악 인생은 현재 진행형의 싱그러운 젊음 덕에 언제까지나 여전하다.

 
3집 《말도 안돼/부서진 밤》(동아기획/서울음반, 1992)
▲ 3집 《말도 안돼/부서진 밤》(동아기획/서울음반, 1992)

독보적이고 독특한 카리스마

 

뜨악하게 치켜 뜬 눈, 어딘가를 노려보는 듯한 눈빛. 그러한 눈을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화장(혹은 분장?). 그녀, 한영애의 눈(빛)은 남다르다. 범접하기 어려운 형상에 걸맞게 그녀의 패션도 그렇게 분장되곤 했다. 최근의 예를 들면, 2003년 트로트 리메이크 음반을 발표했을 때는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 혹은 단발머리에 한복 차림이었는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한국적이라기보다는 이국적인 것이었다. 한편, 공연도 '퍼포먼스' 같은 느낌을 준다는 사실은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는 비단 비주얼만이 아니라 사운드도 그런 느낌을 준다.

한영애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독특하다'라는 말은 너무 상투적이고 때때로 지극히 애매모호한 어휘이지만, 한영애를 설명할 때 그만한 말도 없을 듯하다. 그만큼 그녀는 (남녀 보컬리스트를 통틀어도) 독특한 카리스마를 지닌, 전무후무한 유형의 여성 보컬리스트이다. 서양의 여성 뮤지션들과 비교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맥락이나 스타일도 다를뿐더러 한영애는 한영애만의 독보적인 독특함이 있다. 그녀의 이미지는 제의적이면서도 관능적이고 친근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주술사이자 성녀/마녀이고 위안자이다. 한영애는 그간 여성 보컬리스트 계보에서 보기 힘든 유형임에 틀림없다.

한영애는 후배격 여성 보컬리스트들인 장필순이나 이상은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보컬로 인식되어 왔다. 게다가 앞서 이 기획에서 연재되었던, 연대가 다소 오래되었거나 활동을 하지 않는 다른 뮤지션들과 다르게, (물론 앞으로 거론될 다른 여성 가수들과도 다르게) 현재 활동 중이기도 하고 소개도 많이 되었다. 그런 덕에 어쩌면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 바닥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익숙해서 지겨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다채로운 음악 연대기,

포크, 블루스, 록, 테크노, 트로트와 만나고 헤어지다

 

《어젯밤 꿈/사랑의 바람(이정선 작편곡집)》(지구, 1977),
《작은 동산》(유니버어살, 1978) (왼쪽부터) 비공식 독집 음반

우선 한영애의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보자. 당연히도 1970년대 후반, 포크 노래모임 '해바라기'를 거론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때 이정선을 필두로 한 해바라기에서 두 장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한영애라는 이름을 세간에 알렸다. 그 외에 (많은 이들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백호빈, 오종국과 함께 낸 《우리 두 사람/시골풍경/사랑의 편지》 (힛트, 1976)가 해바라기보다 먼저이고, 또 다른 작업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비공식' 작업이라 불릴만한, 두 장의 독집 앨범 《어젯밤 꿈/사랑의 바람(이정선 작편곡집)》(지구, 1977)과 《작은 동산》(유니버어살, 1978)이 있지만, 아무래도 한영애의 본격적인 활동상은 해바라기부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해바라기 노래모음 제1집(구름.들꽃.돌.연인/하늘 가득히)》(지구, 1977)와 《뭉게구름/여름》 (지구, 1979)을 발표했던 해바라기 시절, 한영애는 꾸밈없는 청순한(?) 포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자연스럽고 중성적인(혹은 무성적인) 포크의 이미지의 그것이었다. 긴 생머리, 셔츠에 청바지 차림, 그리고 '통기타' 사운드 및 거기에 얹힌 목소리는 포크 음악에서 지향했던 자연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말해준다. 그것도 '건전한 싱얼롱' 스타일의 음악이었다. '비공식' 독집 앨범들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비슷하다. 단, 그녀의 목소리는 1977년작에서 '풀 오케스트라'의 인스트루멘테이션 속에 묻힌 듯한 인상이 들고, 1978년작에서는 다소 거친 질감의 사운드와 걸맞지 않게 지나치게 순박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해바라기, 자연친화적이고 무성적인 포크 시절의 한영애(왼쪽)
《해바라기 노래모음 제1집(구름.들꽃.돌.연인/하늘 가득히)》

그 후 한영애는 음악 무대를 잠시 떠나 연극 무대로 이동했다가 1980년대 중반 음악 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부터 그녀는 보컬리스트로서 자신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신촌블루스를 거쳐 (신촌)언더그라운드의 대표자가 되었다.

사실 한영애의 기본적인 자양분은 '포크'이다. '공식' 솔로 1집 《여울목/건널 수 없는 강》(동아기획/서라벌, 1986)의 <여울목>(한돌 곡)이나 2집 《바라본다》(동아기획/서라벌, 1988)의 <호호호>(이영재 작곡)처럼 한영애의 시발점을 이루는 '포크'와 맞닿아있다. 그렇지만 이런 곳에서도 한영애는 흔히 (여성) '포크' 뮤지션에게 나타나는 맑고 청아한 톤과는 다소 궤를 달리하는, 다소 낮고 허스키한 것이었다. 3집 《말도 안돼/부서진 밤》(동아기획/서울음반, 1992)의 <멋진 그대여>(송홍섭 작곡)처럼 속삭이듯 포근한 곡이나 4집 《불어오라 바람아/너의 이름》 (새한미디어, 1995)의 <가을시선>(한영애 작사, 이병우 작곡)처럼 회한적이고 사색적인 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한영애'라는 존재를 각인시킨 것은 '블루스'라 이를 만한 노래들이 아닐까. 솔로 1집의 <건널 수 없는 강>(이정선 작곡)을 필두로 시작되어, 신촌 블루스의 1집 《그대 없는 거리/아쉬움》(지구, 1988)에 실린 <그대 없는 거리> 및 <바람인가>(엄인호 작곡), 그리고 솔로 2집의 <누구 없소>(윤명운 작곡), <루씰>(한영애 사, 엄인호 곡) 등을 통해 한영애는 '블루스의 여왕'으로 등극한다.

이런 음악들이 블루스인가 아닌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자리의 주제는 아니지만, 세간에서 이를 '한국적 블루스'로 부르는 끈적한 사운드에는 한영애의 힘이 실린 탁성이 주요한 역할을 함에 틀림없다. 이런 계보의 음악은 나아가 2집의 <코뿔소>(이승희 작곡)이나 <바라본다>(김수철 작곡) 같은 로킹한 사운드와 접점을 이루면서, 한영애의 날카로운 고음 샤우팅이 조우한다. 이러한 묵직하고 강렬한 포효에는 보헤미안적 자유로움과 음악에 대한 열정과 실연에 대한 아픔 등이 교차한다. 때때로 4집의 <창밖에 서있는 너는 누구>(한영애 작곡)처럼 존재론적 질문이 호명되기도 한다.

《그대 없는 거리/아쉬움》
(지구, 1988)신촌블루스 1집

그런데 한영애의 가창에는 연극적, 뮤지컬적, 혹은 판소리적이라고 부를 만한 부분이 존재한다. 한음 한음 딱 떨어지는 명징한 발성이 아닌, 인접음들을 연결시키는 창법 때문이다. 때로 말하는 듯한 노래들이 두드러지는데, 3집 <조율>(한돌 작곡)에서 동일음으로 내뱉는 판소리 같은 노래나, <말도 안돼>(한영애 작곡)에서 화답하는 듯한 뮤지컬적 보컬이 그런 예이다.

그녀의 발걸음은 테크노/일렉트로니카로 옮겨지기도 했다. 4집 <돌아오지 못한 사람>으로 그 변환을 암시했다면 5집 《난.다/섬아이》 (Samboo Music, 1999)에서는 한영애의 본격적인 '비상구'로 낙점된 듯하다. <난.다(飛上口)>(한영애 작사, 신윤철 작곡)와 <감사의 마음>(한영애 작곡)을 들어보라. 특히 <감사의 마음>에서 사제의 주문 같은 창법은 주술성과 이국성을 동시에 건져올리는 '테크노스피리추얼리즘'의 현현이 아닐까.

그녀의 근작(이라고 해봐야 벌써 2년 전의 일이지만) 《Behind Time: A Memory Left at an Alley》 (뮤직 웰/YBM서울음반, 2003)는, 비하의 영역이기도 했던 트로트와도 접합한 산물이다. 부정을 끌어안는 긍정의 시선이라고 할까. 이러한 작업의 단초는 5집에서 <봄날은 간다>였고, 종국에는 트로트 리메이크 음반으로 결실을 맺었다.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Men

 

《Behind Time: A Memory Left at
an Alley》 (뮤직 웰/YBM서울음반,
2003) 트로트 리메이크 음반 

포크, 블루스, 록, 테크노, 트로트 등으로 이어지는 연대기만큼 그간 그녀와 작업한 음악인들도 다채롭다. 사실 이정선은 한영애에게 가장 오래된 사부이자 지음(知音)일 것이다. 이정선은 해바라기나 신촌블루스를 통해 혹은 솔로 음반에서 오랫동안 후광 역할을 한 뮤지션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영애의 '공식' 솔로 1집(1985)은 오세은이 기획/프로듀싱을 하고, 이정선은 물론, 한돌, 엄인호 등의 곡들을 수록했다. 2집(1988)에서 만난 송홍섭의 경우는 5집(1995)에 이르는 시간 동안 한영애의 연대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음악적 동료일 것이다. 동아기획을 나온 뒤 발표한 3집(1992)에서는 그의 '송스튜디오'가 아지트가 되기도 했다. 3집에서는 날 선 기타의 신윤철, 박청귀와 다양한 건반 톤을 주조하는 정원영 등이, 4집에서는 이병우, 손진태, 강기영, 이태윤 등 많은 뮤지션들이 이합집산했다. 이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한영애 음반의 배후인물로 등록했다. 그런데 이들과의 조우가 모두 성공적이었는가는 평가하기 나름일 것이다. 일례로, 4집에서 만난 이병우와의 조합은 화학적인 증폭을 일으키지 못한 듯하다. 

달파란(강기영), 장영규, 방준석, 이병훈 등으로 이루어진 음악창작집단 '복숭아'의 경우는 트로트의 영토에 안착하기 위한 동반자로 선택되었다. (복숭아의 멤버이기도 한 어어부프로젝트가 그러했듯) 3류와 실험, 복고와 키치(캠프)의 중간좌표 어디쯤 위치한 그들은 트로트라는 애매모호한 지표 위에 그녀가 안착할 둥지를 제공해 주었다.

한편, 솔로 앨범(두세 장의 '비공식' 음반들, 다섯 장의 솔로 정규 앨범, 그리고 한 장의 리메이크 앨범 등)과 라이브 음반 같은 자신만의 음악뿐 아니라, 때때로 한국 대중음악의 계보화를 위한 헌정과, 동료 음악인에 대한 우정을 표시하는 일에도 부지런히 참여했다. 가령 《A Tribute To 신중현(바람/봄비)》 (난장/서울음반, 1997)이나 《하나로(김현식 추모앨범)》 (뉴서울레코드, 1991)처럼.

사실 엄밀한 의미로 한영애는 '싱어송라이터'는 아니다. 물론 3, 4집 등에 이르면 한영애 자신의 창작곡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3집에는 한 곡, 4집에는 세 곡이 포함. 물론 작사의 경우는 더 많다). 그런데 반드시 모든 작곡을 해야 훌륭한 가수인가 하는 통상적인 공식에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단지 자신이 원하는 노래를 만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 기꺼이 본인이 직접 만들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한영애는 작·편곡자, 연주자, 혹은 프로듀서 등 수많은 음악인과, 그리고 포크와 블루스, 록, 국악 등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과 만나면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에 맞는 노래를 고르거나, 혹은 역으로 주어진 곡에 맞게 노래할 줄 아는 '가수'임에는 틀림없다. 보통의 여성 보컬과는 다른, 자신만의 목소리에 자신의 것을 담는 능력, 그것이 바로 한영애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Behind Time1925~1955 A Memory Left At An Alley : 목포의 눈물 / 선창 (2003)

 

한영애와 트로트의 만남
"BEHIND TIME" A MEMORY LEFT AT AN ALLEY

한영애가 새 앨범을 발표한다. 1985년 자신의 첫 독집을 발표한 이후 3년 혹은 4년에 한장 꼴로 새 앨범을 발표해온 그녀는 앨범 한장 한장을 낼 때마다 시대와 발맞추어 걸어왔다. 한영애 음악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포크와 블루스로부터 시작해서 3집과 4집에서는 ROCK적인 요소를, 99년에 발표한 5집 < 난.다 > 에서는 테크노를 시도하고 있다. 남들에 비해 유달리 긴 준비기간은 항상 현재진행형의 음악을 보여주고 싶은 그녀의 욕심이다. 그리고 다시 4년이 지나, 새로운 세기에 처음으로 발표하는 이번 앨범에서 한영애는 느닷없이 과거로 손짓을 하고 있다. 포크도 블루스도 아닌 트로트. 일제시대로부터 1950년대까지의 향수어린 노래를 그녀만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한영애의 노래

어느 장르의 음악과 만나건, 그녀가 노래하면 온
전히 한영애의 것이 된다. 가장 흑인적인 음악인 블루스를 해도, 60년대 말의 백인 히피문화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포크를 부를 때에도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항상 한영애라는 오리지널리티를 갖게 된다. 가슴속 어느 곳에 응어리진 한스러움을 토해내는 것과 같은 그녀의 목소리. 듣는 이들을 토닥토닥 위로해주는 것과 같은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노래에는 그런 힘이 있다. 선사시대 어느 여사제의 주문과도 같이, 지친 영혼을 위무하는 그런 힘이다. 한국인이 아니고서는 갖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그런 한스러운 정서를, 그녀는 노래로 불러내고 다시 노래로 위로한다. 그것이 어떤 음악과 만나건 그녀의 노래가 가장 한국적이면서, 또한 가장 세계적이 되는 이유이다
그런 한영애가 해방 전후, 그리고 6.25 직후까지의 우리 음악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의외의 일이 아니다. 그시절의 음악들. 우리의 불행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잠시라도 위로를 던져주었던 그 음악들이야말로 우리네 정서의 뿌리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다시 한번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영영 잊혀질 지도 모르는 그 노래들을 기억속으로부터 끄집어 내어 우리를 돌아보는 일은, 한영애가 해야한다. 라고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양 싶다.

한스러운 역사속의 노래를 통한 한판 씻김굿

앨범의 편곡과 프로듀싱은 젊은 음악창작집단 ‘복숭아’가 맡았다. 달파란, 장영규, 방준석,이병훈 등 네명의 실력있는 음악인들이 모여 가요계와 영화음악계로부터 동시에 주목을 받고 있는 이들은, 음악을 통해 오랜 선배들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우리 시대에 가장 실험적인 음악을 하는 뮤지션인 이들이 반세기가 더 지난 시절의 음악과 만나고 우리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인 한영애와 만난 결과물이 이 음반이다. 이 음반을 통해 옛것은 더 이상 지나버린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 속으로 다시 녹아든다. 과거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 시절을 불러내어 위무하는 것. 대한민국의 눈물 많은 역사에서도 가장 한스러웠던 그 시절의 노래를 부름으로써, 그녀는 한판 씻김굿을 펼치려 하는지도 모른다.

신선한 해석과 편곡의 이색적인 앙상블이 매력적

윤심덕의 드라마틱한 삶으로 더욱 유명한 < 사의 찬미 >,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곡 < 강남달 >로부터 시작해서, < 황성옛터 >, < 굳세어라 금순아 >, < 목포의 눈물 > 등 한국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음악들과 함께, 이 음반을 통해 처음 2절까지 완벽하게 녹음된 < 부용산 >, 지금도 애창되는 정감 어린 동요인 < 따오기 > 등 1925년부터 1953년까지의 다채로운 노래들이 선곡에 포함되었다. 특히 복각음반을 통해 재발굴한 < 꽃을잡고 >는 원곡이 가진 아방가르드한 매력을 그대로 잘 살려 독특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흥겨운 스카 리듬을 도입한 < 선창 >이 귀에 쉽게 들어오며, < 오동나무 >에는 버블 시스터즈, < 강남달 >에는 어어부프로젝트의 백진이 각각 FEATURING 하여 앨범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과감하게 새로운 해석을 도입한 다른 곡들과는 달리 < 목포의 눈물 >과 < 타향살이 >는 원곡 그대로의 접근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앨범의 하일라이트는 < 애수의 소야곡 >과 < 외로운 가로등 >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오래된 멜로디를 모던한 감각으로 풀어낸 <애수의 소야곡>은 원곡과는 달리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느낌을 준다. < 외로운 가로등 >은 블루지한 기타와 재즈의 느낌을 주는 클라리넷, 그리고 잘 정돈된 스트링 어레인지가 어우러져 이색적인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앨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이 두 곡에서 한영애의 목소리가 가진 매력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컴필레이션 - Special Collection 5 Plus : 푸른 칵테일의 사랑 / 여울목 (2001)

5집 - 난.다 : 난.다 / 섬아이 (1999)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여성 뮤지션 한영애가 4년만에 테크노가 가미된 다섯번째 음반 '난.다'를 발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 5집 앨범은 < 여울목 >, < 루씰 >, < 코뿔소 >, < 누구없소>, < 말도 안돼 >, < 조율 > 등으로 이어지는 한영애만의 독특한 '포크&블루스' 정서에 현대적인 테크노 사운드가 결합된 것으로 기존의 한영애 음악과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타이틀곡 < 난.다(비상구/非常口) >는 신윤철의 곡에 한영애가 직접 노랫말을 쓴 것으로,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어 너의 꿈이 이루어지리라 / 껍질을 깨고서 우주를 안고 난다 난다 난다 날아…'라는 가사가 다분히 미래지향적이다. 테크노 반주에 동일한 스타일 코드가 반복되어 '비상(飛上)의 이미지를 잘 전달하고 있다'는 평이다. 또다른 트랙 < 문 > 역시 테크노에 드럼&베이스 연주방식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 미래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외 도도하게 사회를 꿰뚫는 그녀만의 표현이 살아있는
< 봄날은 간다 >와 < 꽃신 속의 바다 > 도 주목되는 곡으로 꼽히는데, 특히 < 봄날은 간다 >는 애처로운 멜로디에 한국적인 심성을 한 폭의 회화처럼 담아냈다. 또 < 꽃신 속의 바다 >는 해바라기의 옛 멤버 김영미가 부른 포크 발라드로 고운 노랫말과 테크노 반주의 하모니가 이채롭다. 이밖에 한영애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록발라드 < 야화(夜花) >, 레게풍의 경쾌한 멜로디가 신선한 < 따라가면 좋겠네 > 등도 함께하고 있어 그녀의 팬들에겐 색다른 즐거움으로 다가갈 것이다.
한영애는 76년부터 78년까지 해바라기로 활동했다. 그 후 8, 9년간 연극계에 몸담다가 85년 가을부터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그렇게 1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변화를 시도하기엔 다소 모험 같은 이 시기에 그녀는 과감히 변신을 시도했다. 그녀는 말한다. "그저 대중들과 음악으로 대화하듯, 그렇게 나누고 싶은 마음을 음반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베스트 - 한영애 베스트 : 누구없소? / 루씰 (1999)

한영애는 우리나라 대중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뮤지션이다. 그녀의 긴 생명력도 그렇거니와 그녀가 10여년동안 보여주었던 음악 세계 또한 그녀의 선명한 자아를 드러내는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영애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신들린 무당이 한풀이 굿이라도 하는 듯, 그녀가 뿜어내는 열기가 범상치 않다.
대중의 인기에 연연해 하고 대중의 구미에 맞추려 전전긍긍하고 하는 주류 음악 내의 대중 가수도 아니면서, 자신의 고집과 비타협의 자세로 일관된 자신의 음악을 고집해 온 그녀의 인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에너지 가득한 그녀의 음악의 '희소성'은 마력과도 같이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그녀의 신들린 듯한 무대를 본 사람이면 그녀에게 빠지지 않고는 못배겼다.
여기 소개하는 앨범은 정규 앨범이 아니다. 정규 앨범과는 또다른 매력의, 한영애가 무대에 섰을 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완성도가 높은) 두 장짜리 라이브 앨범이다. 이 앨범의 세션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신대철
, 신윤철, 송홍섭, 김효국 등의 한국 최고의 연주인들이며, 그들의 연주는 한영애의 음악을 가장 아름다운 상태로 만들고 있다.
<인트로>가 지나고 나오는 <달>은 한영애를 대중적인 스타로 만든 계기가 된 곡으로 여기서는 김효국의 하먼드 올갠 연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김수철의 곡인 <바라본다>는 한영애 최고의 명곡임이 분명하고, 한돌의 곡인 <갈증>은 한영애의 파워풀한 보컬의 매력이 매력적이다. 이정선의 <건널 수 없는 강>은 한국적인 블루스 곡으로 신들린 듯한 한영애의 보컬이 대단히 인상적인 곡이다. 정원영의 곡인 <부서진 밤>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음악적인 완성도와 드라마틱한 구성이 돋보이는 감동적인 곡이다. 장제훈 작사, 이영재 작곡의 <멋진 그대여>는 한영애의 다른 노래들과 달리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의 곡이지만, 프로그레시브(!)적인 구성을 엿볼 수 있다. 이정선의 <이어도>는 한영애의 음악적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한국적 블루스'란 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곡이다. 두 번째 디스크의 첫 곡인 <말도 안돼>가 지나면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코뿔소>가 나오고, 이어 '신촌블루스'의 곡으로도 유명한 엄인호 작곡, 한영애 작사의 <루씰>이 나온다. <여인#3>은 한영애의 한숨 섞인 듯한 목소리만으로 듣는 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곡이며, 다음을 잇는 곡은 한영애 최고의 히트 곡인 <누구없소>다. 한영애 작사, 이정선 작곡의 <이별 못한 이별>은 매우 감성적인 기타 연주로 시작하여 한영애 특유의 흐느끼는 듯한 한서린 보컬이 '슬픔', '아쉬움', '후회' 등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돌 작사, 작곡의 <조율>은 라이브 앨범에서 오히려 원곡을 뛰어넘는 연주와 노래를 보여주고 있는데, 한영애의 힘찬 보컬과 백밴드의 합주가 어우러져 라이브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고 있다.
이어, 앵콜곡인 <여울목>... 이 노래는 초기 한영애의 포크 가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곡이다. 따뜻하고 정감 있는 느낌의 이 곡을 마지막으로 긴 라이브 앨범은 끝나게 된다.....

 

4집 - 불어오라 바람아 : 불어오라 바람아 / 너의 이름 (1995)

대중에게 그녀의 새로운 음악 인생 시작을 알리는 음반이었고, 그녀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음반이다. 일면 무겁게 들릴 수 있는 노래들로 대중에게는 외면을 받은 작품이지만, 그 무거움이란 진실되고 절실한 삶의 경험을 통해서 형상화된 진지함으로 적어도 한번은 심각하게 대해 볼 필요가 있는 가치 있는 것이었다. 이 당시 그녀는 '세상을 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감성도 달라지고 이웃을 대하는 태도 등 모든 것에 감성이 풍부하고 아름다웠던 때'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음반의 가사들에서는 '여과되고 정제된' 느낌을 받는다. "절망에서 무조건 달아나기엔 우리의 하루는 짧다는 것. 외로움에 한없이 부딪친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 길어지는 것"이란 [불어오라 바람아], "일상 속에서 군중 속에 혼자 남겨져 외로울 때 날 위로하는 것은 너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란 [너의 이름]은 이 음반의 백미이다.
아티스트로서의 탄생을 볼 수 있는 음반이다.
93년 그의 오랜 동료인 송홍섭과 공동으로
프로듀서를 맡은 2장짜리 라이브 앨범 <아.우.성>이 여실하게 증명하듯이 무대에 대한 그의 끝없는 존중심은 (80년대 전반의 대부분을 연극 무대에서 보내서가 아니라) 그의 노래로 하여금 재현 불가능한, 오직 한번의 죽음이라는 충일감을 수용자들의 가슴 속에 심어 놓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보컬 하나만으로도 예술의 경지에 오른 거의 유일한 여성 대중음악가, 70년대 중후반 데뷔 이래 단 한번도 브라운관을 자신의 숙주로 삼아 본 적이 없음에도 이 땅의 진지한 음악 수용자들로부터 마음 속으로 솟아나는 지지를 한결같이 받아온 한영애의 4집 앨범은 단 한곡을 제외한 전곡의 작사를 맡음으로써 이 앨범에 통일성을 부여 했고, <창밖에 서 있는 너는 누구>를 위시한 세 곡의 작곡까지 맡아 싱어송라이터의 반열에 진입하는 하나의 성과를 이룬다.
이 앨범은 한영애 그 자신과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이병우의 이인삼각 경주나 다름 없다. 이 둘이 만나서 풀어 놓는 세계는 앨범의 머리곡 <불어오라 바람아>에서 곧바로 완성된다. 한영애가 '인생이란 나무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오늘을 꿈꾸는 것'이며 '절망에서 무조건 달아나기엔 우리의 하루는 짧다'는 성찰을 획득하면 이병우는 그만의 내성적인 선율 감각으로 차분히 음률의 실타래를 풀어 놓는다. 여기엔 여하한의 도약이나 기교적인 과시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현란한 이미지의 나열을 선호하는 요즘의 감수성이 선뜻 들어설 수 없는 세계이다. 한영애는 이병우와 이 앨범의 프로듀서인 베테랑 송홍섭, 그리고 달관의 경지에 거의 진입해가는 숱한 연주자들의 도움을 받아 포크에서 블루스를 지나 성숙한 세대의 음악을 겨냥한 것이다.....

3집 - 한영애 1992 : 말도안돼 / 부서진 밤 (1992)

당시 많은 매체에서는 그녀의 3집을 두고 '탈(脫) 언더그라운드'라는 타이틀로 소란을 피워댔다. 대마초 사건 등으로 신촌 블루스가 와해되었고 한 팀이기도 했던 김현식은 고인이 되었으며 그것은 '언더 문화' 하면 상징물처럼 떠올려지던 포크 세대들의 잠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사실상 당시 연극적인 콘서트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던 그녀에게 의식이나 저항의 모티브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블루스 가수로서 터를 확실히 잡은 후 뭔가 색다른 것을 찾아 좀이 쑤시던 그녀가 발표한 <말도 안돼>는 강한 록 계열의 시도로 세인의 이목을 주목시켰다.
노래를 한 편의 시로 형상화하는 작곡가 한돌의 작품인 '조율'의 웅장한 코러스와 기승전결의 착실한 단계를 밟아나간 곡 진행은 차라리 감동적이라는 표현이 옳다. 앨범 중 고전적 발라드 풍의 애절한 사랑 노래로 사랑을 받았던 '이별못한 이별'은 강하고 록적인 분위기에 뭉뚱그려진 본작의 숨겨진 백미다.
70년대 중후반 4인조 포크 보컬 그룹 해바라기의 일원으로 등장한 한영애는 하나의 앨범이 얼마나 절대절명의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꿰뚫어 보았다. 블루스를 탑재하고 86년 벽두에 나온 그의 첫 솔로 앨범과 <누구없소>에서 <바라본다>까지 숨막히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88년의 두번째 앨범에 이어 4년만에 발표된 이 앨범에 이르도록 그는 완전연소의 비등점에서 불타 오를 때까지 침묵에게 소리를 양보하는 집요한 견인주의의 작은 성채를 쌓는다. 어느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년에 한장씩의 '판'을 소모적으로 내놓아야 하는 스타시스템과 음반산업계의 강박관념은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송홍섭의 베이스, 박청귀와 신윤철의 기타, 배수연과 김민기의 드럼, 정원영의 키보드의 도움을 받으며 한영애는 그의 음악적 출발점인 모던 포크와 비상의 교두보 역할을 한 블루스에 기반한 그 특유의 록과 두터운 발라드의 실타래를 올올히 풀어 낸다. 한돌이 제공한 <조율>을 통해 그는 김현식도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통찰력과 보컬 카리스마의 결합을 일구어 내고 그의 첫 앨범의 대부인 이정선으로부터 선사받은 <이어도>의 여백을 그의 선배보다도 더 깊게 형상화한다. 그러나 이 앨범의 백미는 역시 앨범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오로지 자신에 의한 첫번째 노래 <말도 안돼>일 것이다. 이 노래에는 그가 걸어온 모든 음악의 스타일과 이상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세상이 변했으니 어쩔 수가 없다고/변하는 건 당연해 어떻게가 중요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는 그의 고집인 것이다.....

 

베스트 - 1993 Best Live 我.友.聲 : 달 / 말도안돼 (1993)

2집 - 바라본다 : 누구없소? / 코뿔소 (1988)

1집을 발표한 직후인 같은 해, 세기의 프로젝트 팀인 '신촌 블루스'의 창단 멤버로 활동하면서 이어진 2집은 블루스적 색채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콘서트와 옴니버스 앨범을 발표하면서 한영애가 자신의 보컬색에 대한 최초의 정체성을 찾은 앨범이다.
블루스 작곡가이자 가수인 윤명운이 만든 '누구없소?'는 실존에 대한 물음이라는 정의를 스스로 내린, 본작의 대표곡이자 1집부터 3집까지의 작업 중 본작을 한영애의 음악적 연대기를 나누는데 있어 정점에 있게 한 의미있는 곡이기도 하다.
샤우팅 창법의 또 한 곡 '코뿔소'는 '누구없소?'와 함께 장르별로 블루스이자, 강한 일렉 기타를 대폭 사용한 파워넘치는 사운드와 힘이 넘치는 보컬로 록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이는 언제든지 다양한 장르의 시도가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반증한다.
작은 거인 김수철이 작곡한 프로그레시브 성향의 '바라본다'도 압권. 전인권, 김현식, 윤명운, 박주연 등 언더그라운드 대표선수들을 코러스로 참여시켜 대중적 지지와
음악적 완성도를 만족시킨 앨범.
자신의 스타일을 완벽하게 찾고, 이를 형상화시킨 음반이다. 그녀가 1집 음반을 만들고 느꼈던 것은 자신의 내부에 '뭔가 소리가 남아도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록 성향의 노래를 향후 하기로 결심했고, 송홍섭의 프로듀싱 하에 국내 최고의 세션 집단으로 녹음을 하였다. 이 음반은 녹음(최병철) 뿐만아니라 세션에서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음반이었다. 특히 기타리스트 박청귀의 발굴은 기타 세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84년 따로 또 같이 2집부터 구체적으로 전문 세션이 인식되기 시작한 이래 드디어 그 결실을 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영애는 이 음반에서 [누구없소?], [달]의 작곡자인 윤명운을 발굴하는 혜안을 보였고, 새로운 스타일의 곡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영재의 [호호호], 유재하의 [비애], 이정선의 [여인 #3], 이승희의 [코뿔소], 한돌의 [갈증], 엄인호의 [루씰], 김수철의 [바라본다]가 실린 이 음반은 타인의 작품만으로도 통일감을 갖는 하나의 결정체가 될 수 있음을 예시한 작품이고, 이에는 프로듀서 송홍섭의 역할도 지대했다.....

 

1집 - 여울목 : 여울목 / 건널 수 없는 강 (1986)

1985년 가수 데뷔를 공언한 그녀의 첫 번째 독집 앨범.
가수로서는 이미 1977년 2월과 이듬해 5월 중창단 해바라기의 앨범 <해바라기> 1, 2집에 목소리를 낸 적이 있다. 노래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한 보컬의 독자적인 파워는 이때부터 그 내공을 쌓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포크 성향의 기존의 이미지를 간직한 채 나즈막히 깔리는 신디사이저의 반주로 시작되는 '여울목'은 그녀의 항해가 돛을 올렸음을 알리는 머릿돌이며, 엄인호의 대표적인 곡으로 손꼽히고 있는 '도시의 밤'은 두 사람의 원숙한 콤비네이션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첫 시점으로 포크 음악의 계보를 내리고 있었던 이정선 작사/곡의 '건널 수 없는 강'은 동의(同意)의 재즈넘버 'River No Return'에 비견할 수 없는 감칠맛을 자랑한다. 호들갑스러운 노처녀의 순수함을 보는 것 같은 마지막 곡 '기분 좋아'까지 총 아홉 곡이 든 본작은 스산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느낌이 지배적이지만 따뜻한 온기를 바라고 들
으면 더없이 포근해지는 '매우' 매력적인 음반이다.
30살 즈음까지 자신이 가장 즐거워하고, 자신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살폈다는 한영애는 이 무렵 드디어 다시 노래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열정만 있었지 정확히 어찌 해야할지를 몰랐던 그녀는 오세은의 기획 하에 역사적인 솔로 데뷔 음반을 발표한다. 이 '역사적인'이란 의미는 그녀 자신이 이 음반의 [건널 수 없는 강]같은 거칠면서 폭발적인 곡으로 새로운 여자 뮤지션의 상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당시까지 통념적으로 여자 가수가 무릇 노래를 부르는 방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예쁘고 사근사근하게' 스타일이었다. 감정의 진솔한 표현이 전제가 되기보다는 정형화 된 이미지에 충실하기를 강요하는 대중음악계에 작은 반란을 불러일으킨 이 음반은 이후 후배 여자 가수들에게 좀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획 의도가 정확히 반영된 음반이 아니라서 완전한 한영애의 음반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들이 많다. 엄인호의 [도시의 밤]은 향후 그녀가 신촌블루스 활동을 포함한 블루스에 근간을 둔 노래를 할 것이란 예측을 하게끔 하는 곡이다.


2집 - 작은동산 : 작은동산 / 갑돌이와 갑순이 (1978)

70년대에 한영애는 해바라기 말고, 2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그 중 하나인 작은 동산은 훗날 CD로 재발매가 되었으나, 정말 희귀하고, 차라리 작은 동산 LP가 종종 눈에 띄니 그 판을 구하는 쪽이 더 쉬울듯...
그러나, 한영애의 골수팬이 아닌 이상 아주 매력적인 앨범은 아닌듯...

 

1집 - 어젯밤 꿈 : 어젯밤 꿈 / 사랑의 바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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