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뮤직 = 제 3세계 음악
월드뮤직이란
월드뮤직 음반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지 4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후 월드뮤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각 매체에서 BGM으로 보사노바나 탱고 같은 월드 뮤직을 점점 많이 사용하고 있는 추세이고 수많은 티비 광고에서도 다양한 월드 뮤직들이 선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월드뮤직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음악” 혹은 ‘대중음악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그 관심이 집중돼 있다. 물론 월드 뮤직은 영미 대중음악계에서도 진부한 음악적 사운드와 형식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사운드를 찾기 위한 시도로서 진행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월드뮤직의 진정한 가치는 세계의 문화를 이해하는 ‘창’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음악으로서 즐기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세계를 이해하는 창’으로서의 월드뮤직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월드뮤직의 의미 월드뮤직은 클래식, 재즈, 록, 블루스와 같은 장르는 아니다. 뉴에이지(new age)음악이 장르가 아닌 것처럼, 월드뮤직 역시 장르를 의미하지 않는다. 뉴에이지 음악이 장르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모든 뉴에이지 음악이 인본주의와 자연주의, 신비주의를 토대로 한 뉴에이지 운동에 뿌리를 둔 음악이라고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뉴에이지 음악이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된 아티스트나 그들의 음악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뉴에이지 음악은 1980년대 미국에서 붐이 일기 시작한 뉴에이지 운동에 편승하여 메이저 음반사들이 붙인 마케팅 용어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뉴에아지 음악이라는 말 대신 ‘현대화된 연주음악(contemporary instrumental music)이라는 용어로 통일을 하자고 주장을 하는 연주자들이 많다.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 피아니스트 야니는 뉴에이지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연주자로 잘 알려져 있다
월드뮤직의 종류
1탱고의 아르헨티나
2보사노바, 삼바의 브라질
3슬픈 선율의 아일랜드
4영혼의 음악 인도
탱고(Tango)
탱고의 어원은 ‘만지다’는 뜻의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비롯되었다. 탱고는 19세기 유럽의 댄스와 댄스 음악이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이 혼용된 복합적인 음악 산물이다. 탱고의 문화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라틴 아메리카·아프리카의 유기적인 결합은 19세기 아르헨티나의 복합적 문화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남부 유럽의 고전적인 춤곡과 아프리칸 이주민들의 민속음악이 결합된 탱고 음악은 모체, 또는 원조로 쿠바 아프리칸 노예들의 음악 하바네라(Habanera)를 모시고 있다. 하바네라는 19세기 초 쿠바에서 유행한 2/4박자의 춤곡으로, 아바나에서 이 우아한 춤곡을 접한 아르헨티나의 선인들에 의해 19세기 중엽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왔다. 쿠바의 하바네라는 아르헨티아에서 더 강한 템포감과 아르헨티나 목동의 노래, 가우초의 멜로디가 차용된 ‘밀롱가’(Milonga)―현재 탱고의 변형된 형식이나 댄스 홀을 지칭한다―라는 고유한 형식으로 발전한다.
1860∼70년에 즈음하여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산된 밀롱가는 아프리칸 흑인 노예의 주술적 의식을 표방한, 독특한 싱커페이션을 가진 2/4박자의 카니발 음악 칸돔블레(Candomble)로 진화하고, 이는 탱고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음악이 되었다. 그 밖에 유럽의 폴카와 중남미의 격렬한 축제 음악 살사와 볼레로에서도 그 내용을 흡수하게 된다. 탱고 음악에 함유된 복잡하고 다양한 다문화적 배경은 탱고 음악이 오늘날 인종과 민족에 구애받지 않고, 월드뮤직으로서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요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탱고의 산지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항구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지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된 것은 1880년대이며, 1930년대까지 급속한 팽창이 이루어져, 짧은 시간에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19세기 말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유럽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이주민들로 가득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기가 가득한 이국적인 ‘남미의 파리’의 거주자 중 75% 이상이 유럽에서 이주해온 이민자들이거나 그들의 자손들이었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남쪽에 있는 지저분한 항구인 보카에는 부두와 신생 공업 지대가 인접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온 극빈층 이주민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이 가난한 서민의 도시에는 유럽의 생활양식 그대로인 카바레와 음악이 흐르는 선술집과 레스토랑이 보헤미안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고 있었다. 거친 항만 노동자와 도축업자, 밀수꾼과 거리의 여인들이 뒤엉킨 이 도시의 풍경에는 생활에 찌든 노동자의 권태와 고독감이 가득하였다.
이렇게 하층민의 가난한 삶과 체념적인 인생관은 라틴 음악의 격정과 융화되어 탱고 음악의 정서와 내용이 되었다. 흥청대는 밤거리와 어둡고 습기 가득한 보카의 일상은 2/4박자의 강렬한 리듬감과 악센트를 자아내며, 강한 호소력으로 그들의 삶과 영혼을 지배했다. 보카의 빈민굴에서 발생한 탱고는 처음에는 항구에서 기생하는 도박사·밀수꾼 등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했으므로 ‘포르테냐 음악’(Musica Portena)이라고도 불렸다.
● 초기 탱고 음악의 발전
최초의 탱고 곡은 1880년대에 발표된 ‘Bartolo’로 기록되고 있으며, ‘El Choclo’의 작곡자인 앙헬 비요르도가 기타와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며 장난스럽게 불렀던 노래가 탱고 음악의 원형이었다. 초창기의 탱고는 플루트·클라리넷·기타·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지만 1910년 무렵 ‘El Amancer’의 작곡자인 로베르토 피르포가 처음으로 독일에서 수입해온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를 사용하면서, 반도네온은 탱고를 특성화하는 상징이 되었다.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은 강력한 스타카토·레가토 주법으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독특한 리듬감을 재현하는 데 더없이 유용한 도구였다. 1910년대 오스발도 푸글리에세에 의해 제안된 탱고의 기본적인 편성은 ‘오르케스타 티피카’라는 고유한 명칭의 반도네온 2대, 바이올린 2대, 피아노 1대, 베이스 1대로 구성된 6중주 편성으로 확립되었다. 때로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축소한 반도네온 1∼2대, 바이올린 1∼2대, 피아노 1대, 베이스 1대의 편성인 ‘콘훈토’는 더 밀도 높은 연주에 사용되기도 했다.
카를로스 가르델은 탱고 음악의 첫 번째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수려한 외모와 아름다운 음색, 뛰어난 작곡 능력을 보유한 그는 여러 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탱고 스타였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19세기 말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서 유럽과 남미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결합하며 탱고 음악의 특성을 대중들에게 설파했다. 그는 자신이 주연했던 영화에서 13세 소년, 아스토르 피아졸라를 발탁하기도 했다. 가르델은 1937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백 곡의 히트곡을 남겼다. 초기에는 주로 왈츠나 쿠에카·가우초 등의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을 연주하다가, 1917년 최초의 탱고 히트곡 ‘Mi Noche Triste’를 발표하면서 아르헨티나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Mi Buenos Aires Querido’는 그의 이름을 오늘에까지 지속시켜주었던 초기 탱고 음악의 명곡들이었다.
가르델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그가 뿌린 씨앗들은 하나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가르델과 함께 ‘현대 탱고의 시조’라 불렸던 훌리오 데 카로를 비롯해서 로베르토 필포·프란시스코 카나로·오스발도 프레세도·후안 필리베르토 등이 포스트 카를로스 가르델 시대의 주역으로 초기 탱고의 발전을 진두 지휘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음악은 단순한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탱고의 또 다른 의미인 무용을 위한 목적을 특화시켰다. 이때부터 탱고 음악은 춤곡의 성격을 전면적으로 띠기 시작했으며, 탱고 음악을 위한 대규모 밴드가 조직되었다. 후안 데 아리엔조와 아니발 트로일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 쿰파르시타’와 같은 정식 오케스트라 버전의 곡을 생산했다.
탱고의 황금기라 일컬어지는 1930년대는 탱고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혼란의 시간이었다. 1930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군부가 아르헨티나를 점령하면서 탱고 음악은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3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문화를 향유할 수 없었던 폭정 시대에 탱고 음악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탱고가 연주되고, 탱고 춤이 함께 흐르던 클럽과 댄스 홀은 폐쇄되었고, 수많은 탱고 작곡가와 뮤지션들이 블랙 리스트에 오르며, 창작의 날개를 꺾어야만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면서 탱고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탱고 음악은 ‘아르헨티나 서민들의 자유를 위한 찬가’라는 의미가 보태졌다. 가난한 빈민층의 음악이었던 탱고는 지식인과 상류층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이미지로 변모되어 갔다. 1946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표방하며, 기층 민중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군인 후안 페론이 집권하고, 아르헨티나 국민의 연인이자 성녀였던 영부인 에비타가 정열적인 탱고를 선보임으로써, 탱고는 다시 한 번 최고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1952년 에비타가 사망하기 전까지 아르헨티나의 전역에는 수백 개의 탱고 오케스트라가 번성하였고, 크고 작은 댄스홀에는 수만 명의 댄서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론주의가 선택한 정치적, 외교적 고립, 그리고 1955년 로나르디 군부의 집권과 경제적 공황을 겪으면서 탱고는 20여 년 동안 암울한 어둠 속에서 버려져야만 했다.
● 탱고의 부활
에비타의 사망, 그리고 기층 민중의 힘을 두려워했던 군부 독재가 탱고를 억압하면서, 탱고는 2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침묵해야만 했다. 탱고가 연주되던 클럽이나 살롱은 문을 닫았고, 자연스레 탱고 오케스트라는 하나둘 해체되었다. 탱고를 연주하던 뮤지션들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으며, 수많은 초기 탱고 음악의 선구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오르케스타 티피카의 편성은 축소되고, 레코드 녹음이나 해외 공연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탱고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탱고 음악이 겪은 모진 풍파와 함께 대중들의 기호도 변모했다. 이런 변화의 요구에 발맞추어 탱고 음악 역시 새로운 체질 개선을 시도하게 된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였다. 영원히 소멸될 것만 같았던 탱고가 새로운 부흥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 탱고의 우상,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등장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의 닫혀진 음악, 제한된 음계와 화성학에 갇혀 있던 탱고 음악에 날개를 달아 드넓은 창공을 보여주었다. 그는 독창적인 화음 개념을 부착시켜 1959년 ‘Adios Nonino’를 발표한 이후 ‘Berretin’ ‘Verano Porteno’ ‘Melancolico Buenos Aires’ 등의 현대 탱고의 걸작을 쏟아내면서 탱고의 새로운 차원과 부흥을 꾀했다.
피아졸라는 “탱고도 재즈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탱고 음악이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양식으로 진화·발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내딛은 ‘새로운 탱고’(El Nuevo Tango)를 향한 선언 아래 깨어 있는 탱고 작곡가와 연주자가 몰려왔으며, 이 변화의 흐름 속에 탱고는 오늘까지 닫혀진 음악 형식이 아닌 열린 음악으로 진화하고 있다. 피아졸라의 고군분투 속에 탱고는 재즈와 클래식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음악가의 귀와 가슴을 유혹했으며, 더 이상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음악으로만 구속되지 않았다.
1977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카를로스 가르델과 훌리오 데 카로의 탄생일인 12월 11일을 ‘탱고의 날’로 제정했으며, 1980년에는 탱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고 부흥의 리듬은 고조되었다. 1987년 탱고의 명곡에 당시의 스텝을 가미한 ‘탱고 아르헨티노’의 공연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세계의 모든 음악가들은 자신의 창작에 탱고라는 라틴 아메리카의 격정과 비감 어린 음악을 넣기 위해 탱고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
1998년 ‘탱고’라는 영화를 연출하여 탱고가 단순한 음악과 춤이 아닌, 그 자체로서 문화임을 일깨웠던 영화감독 카를로스 사우라는 “탱고의 영혼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전까지 나의 작업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라고 탱고의 의미를 밝혔다. 아르헨티나의 생선비린내 가득한 선창과 홍등가의 흐린 불빛 아래에서 태어난 탱고는 가난한 민초들의 삶에 스며 있는 애환과 영욕, 기쁨과 눈물, 집착과 한이 어우러진 고단한 삶의 기록이며, 그들이 살아가고자 하는 희망이며, 처절한 몸부림이다.
탱고의 종류
탱고의 종류를 살펴보면, 탱고는 현재 서로 다른 몇 가지 스타일로 나뉘어져 있다 .
댄스스포츠에 포함되어 널리 알려져 있는 유럽스타일의 콘티넨탈 탱고(Continental Tango),
미국에서 자국내의 국민들을 상대로 널리 보급되어 추어지는 아메리칸 탱고(American Tango) 탱고가
탄생한 곳인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 자리잡고 현재도 전 세계에 그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는
아르헨티나 탱고(Argentine Tango)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많이 보급된 춤은 인터내셔날 스타일의 탱고인 콘티넨탈 탱고이다.
탱고를 이해하려면 우선 탱고의 원태생인 아르헨티나 탱고와 인터내셔날 탱고의 특성과 그 상이점을 알아야 한다.
아르헨티나 탱고
아르헨티나탱고의 탄생과 그 과정 그리고 기본이 되는 몇 가지 동작들을 분석하여보면 아르헨티나 탱고(Argentine Tango)가 모든 형태의 탱고의 기원임을 알 수있다.
탱고라는 용어의 어원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설은 아프리카의 오래된 언어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어떤 장소를 뜻하는 말이 그 기원이라는 것인데, 아르헨티나에서는 칸돔베(Candombe)를 추는 장소를 지칭하는데 쓰여졌다. 일반적으로 `탱고'란 용어는 19C 중반에 지금과 같이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탱고의 기원은 많은 논란이 있지만 18세기 초에 쿠바의 하이티에 노예로 이송되어온 아프리카 흑인들에 의해 전해진 아프리카의 춤인 탱가노(Tangano)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뭏튼 열대농장에서 일하던 노예(농민)들의 음악에서 유래되어 유럽으로 건너가서 발전된 춤이라 할 수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빈민지역에 성행한 밀롱가(Milonga)와 19C 후반에 쿠바의 선원에 의해 아르헨티나로 건너간 `하바네라', 칸돔베(Candombe)와 결합하면서, 하바네라의 우아함과 칸돔베의 강한 리듬과 빠른 템포의 형태를 지닌 밀롱가로 재 탄생된 것이다. 하층민의 문화를 멸시하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중산층과 상류층은 한때는 탱고를 금기시하였지만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탱고가 유행하기 시작하며 이때 마루에서 춤을 추는 살롱탱고가 발전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아르헨티나 탱고로 발전되었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동작적 특성
Embrace
아르헨티나 탱고에는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탱고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 둘째, 음악에 맞춰 걸을 수 있는 능력으로, 아르헨티나 탱고는 정확한 박자가 없다.
기본 스텝만 해도 8박자로 되어있지만 5박자에서 12박자까지 사용된다.
셋째로, 음악에 맞춰 멈춰서 있는 멈춤이다.
특히 이 멈춤에 있어 단순히 서로 안고있는 동작이 멋진 춤이 되기 위해 Embrace가 매우 중요하다.
이 Embrace 때문에 아르헨티나 탱고가 다른 춤보다 더 로맨틱하고 관능적이라는 평을 받게 되기도 한다.
보통 남자의 오른쪽 가슴과 여자의 왼쪽 어깨, 그리고 두 사람의 광대뼈와 이마 사이의 부분을 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서로 얼굴을 떨어뜨리고 늑골 아랫 부분부터 밀착시키는 콘티넨탈 탱고와 가장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성이다.
이 자세는 보통 남자의 오른쪽이 여자의 왼쪽과 밀착되고 남자의 왼쪽과 여자의 오른쪽은 살짝 열리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체중의 대부분을 자신의 다리에 싣고 약간만 서로의 앞쪽으로 체중을 보낸다.
그러면 여자가 남자에게 완전히 안기는 듯한 상태가 된다.
이 상태에서는 많은 종류의 스텝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Giro(돌기), Gancho, Sacada 등의
스텝을 할 때는 남자가 여자를 자신에게서 살짝 떨어뜨리고 왼팔을 낮춘다.
이때, 여자는 자신의 다리로 다른 종류의 동작을 할 수 있는 공간적 여유를 갖게 된다.
중요한 것은 남녀 모두 이 멈춤을 음악적으로 잘 이용하는 요령이다.
Ocho, Gancho
탱고의 독특한 특징중의 하나가 남녀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점이다.
탱고만이 갖는 대표적인 동작으로 오쵸, 간쵸와 볼레오 등이 있다.
오초는 8 이라는 뜻인데, 말그대로 크로스와 피봇을 통해 8자 모양을 그리는 스텝을 말하며,
보통 앞으로 하는것을 오초 아델렌떼(Adelante: Forward), 뒤로 하는 것을
오초 아뜨라스(Atras: Backward) 라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간초는 "고리’라는 뜻으로 상대방의 다리를 본인의 허벅지와 종아리로 재빠르게 걸었다가 놓는 장식 동작이며,
볼레오는 "던지다"라는 뜻의 한쪽 다리로 반대 다리를 감는듯한 장식 동작으로 무릎은 붙이고
한쪽 다리를 회전 시켰다 제자리로 가져오는 동작이다. 또한 히로, 사까다 등의 동작들이 탱고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모던탱고(콘티넨탈탱고)
1930년대에 들어서서 탱고에는 주목할 만한 전환의 시기가 도래했다.
연주 밴드들은 좀 더 많은 스타카토의 효과를 얻어내기까지 강력한 비트(beat)를 요구하는 압력을 받았으며,
탱고 무용수들은 탱고 본래의 몽환적이고 느긋하며 자유로운 방식으로 탱고를 추는 대신에,
특히 경쟁적으로 손과 발, 몸통의 스타카토 움직임으로 춤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과장된 고개 짓이나 어깨의 움직임,
규격화된 리듬으로 완전하게 전환된 춤을 새로이 만들어 냈다. 이와 같이 새로 탄생된 모던탱고(Modern Tango)는 분당 33소절의 템포로 춤추는 스타카토 댄스(Stacato Dance)이다.
이 춤은 1920년대의 영국 무용교사협의회에 의해 정형화되어진 것으로,
19세기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금지된 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 모던 탱고가 발전하여, 오늘날 아르헨티나 탱고보다 세계적으로 더 널리 보급된 유럽 스타일의 콘티넨탈 탱고가 되었다.
이 춤은 영국에서 경기용 무도로 틀이 잡혀갔고, 현재 댄스스포츠(Dance Sport)의 한 종목으로 각광 받고 있다.
2보사노바, 삼바의 브라질
삼 바와 보사노바삼바는 브라질에서 태동한 리듬입니다. 열정적인 경쾌함이 특징인 삼바리듬에 모던재즈기법을 도입한 것이 보사노바 리듬입니다. 따라서 삼바와 보사노바는 서로 같은 형태의 리듬이기 때문에 피아노 연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삼바 리듬으로 유명한 노래는 디스 마스카라등이 있으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리듬만 수입하고 음계는 이질적인 면이 많은 이유로 도입하지 않은 나라가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삼바나 보사노바 리듬에 동양 특유의 5음계 또는 6음계 중심의 음계를 접목시켜 특이한 효과를 내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삼바나 보사노바는 열정적인 리듬에 비해 의외로 연주할 때는 그다지 난해한 리듬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싱커페이션과 서스펜션을 요구하는 부분이 아닌 한 자기 박자에 충실하면서 액센트와 리듬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 좋은 연주가 되리라 생각된다. 또한 삼바와 보사노바 리듬은 피아노 솔로로만 하기에는 부적합 한 리듬이며 드럼과 베이스등 앙상블적인 요소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각 리듬을 피아노로 무리하게 리듬적인 요소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정말 피해야한다 . 다시 말해 드럼과 베이스가 각 리듬을 지속적으로 연주해주는 상황에서 피아노까지 리듬을 표현한다면 연주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연주하고자하는 리듬을 피아노 주법으로 모든 것을 소화해낼 수 없는 것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삼바
삼바춤은 강렬하고 독특하나 율동을 지닌 생동감 넘치는 춤이다.
원래 아프리카에서 유래되었으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노예들에 의해서
브라질 북부의 바히야 지방에서 보급되었고, 마침내 브라 질의 대표적인 춤이 되었다. 처음으로 서양인들의 시선을 끈 것은 연례행사로 열리는 리오데자네이로의 카니발에서였다.
지금도 브라질에서는 삼바학교가 번창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삼바리듬과 기본동작을 발전시키고 있다.
음악은 2/4박자로 두 번째 박자에 액센트가 있으며 1분에 48∼56소절의 템포이다.
앞뒤로 걷는 단순한 스텝, 상하·전후·좌우로 흔드는 몸동작을 특징으로 하며 분절 리듬을 동반하는 4/4박자의 음악에 맞춰 춘다.
각 쌍이 서로 껴안고 제자리에서, 또는 바닥을 돌면서 추며, 변형 스텝을 밟기 위해 서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 춤은 주로 1870경~1914년에 유행한 마시셰에서 갈라져나왔다.
브라질에서는 사교춤 형태의 삼바와는 별도로 더 오래되고 아프리카적인 색채가 강한 유형의 삼바도 춘다.
종종 바투케라고 불리는 이 춤은 일종의 집단무로서 2겹의 직선, 또는 1명의 독무자를 가진 원형 형태로 진행된다.
BOSANOVA
(포르투갈어로 '新潮流'라는 뜻)
1950년대말에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빔 등이 삼바(브라질의 춤과 음악)와 쿨 재즈가 결합해서 만든 브라질의 대중음악.
삼바에서 나온 음악 형식이지만, 삼바보다 멜로디가 더 감미롭고, 타악기가 덜 강조된다.
2/4박자의 당김음으로 처리되며 악기 편성은 다양하지만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짜여져 있어 몇 개의 리듬 악기들, 예를 들어 기타, 마림바우(활 모양의 현악기), 북, 한 음으로 된 피아노 반주로 제한된다. 노래에서는 기악을 배경음으로 물러서게 하여 가수에게 더 많은 즉흥 연주의 기회를 갖도록 해준다. 춤을 위한 보사노바는 미묘한 신체적 리듬과 '투 스텝'의 발 움직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삼바와 거의 같다. 보사노바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바덴 포얼, 짐보 트리오,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빔, 스탠 게츠, 허비 만, 주앙 질베르토 등을 들 수 있다.
보사노바를 대표하는 곡으로는 조빔의 '이파네마의 소녀(The Girl from Ipanema)'일 것이다.
이 장르는 재즈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남미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영화 "검은 오르페우(Orfeu Negro)"가 나온 후 잠시 동안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해질 무렵 바다에서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이 귀를 어루만지는 듯한 음악, 나른하면서도 로맨틱한 리듬…
보사노바는 은근히 섹시한 음악이다. 혹자는 사랑이 끝난 후의 허무함을 담은 음악이라고도 했고, 보사노바 최고의 작곡가,
안또니오 까를로스 조빔 (Antonio Carlos Jobim 혹은 Tom Jobim)은 ‘
차분하고 사랑과 낭만이 있지만, 들떠있는 음악’이라고 보사노바를 정의하기도 했다.
보사노바 (Bossa Nova)의 사전적인 의미는 ‘새로운 경향’. 보사노바는 1950년대 중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바닷가,
코파카바나에서 탄생한 음악이다. 코파카바나는 브라질의 중상류층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이 곳의 클럽에는 미국의 영화나 음악, 특히 재즈에서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려는 쿨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 중에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과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 (Vinicius de Moraes)도 있었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과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첫만남은 1956년에 이루어졌다.
작가이자 외교관이었던 비니시우스가 파리에서 근무할 때 썼던 희곡 ‘흑인 올페’의 음악을 조빔에게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레코드 회사의 전속 뮤지션으로 활동하던 조빔은 단순히 돈이 된다는 이유로 청을 받아들였지만,
그 결과로 보사노바 최고의 작곡, 작사 콤비인 조빔 비니시우스 콤비가 만들어졌다.
두 사람은 하루에 3곡을 만들어낸 날도 있을 정도로 두터운 친분과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며,
Chega de Saudade (No More Blues), Agua de Beber (Water to Drink), The Girl from Ipanema, A Felicidade (Happiness) 같은
명곡을 쏟아냈다. 그리고 이 모임에 한 명이 추가되면서 보사노바는 음악 장르로 완성됐다.
1958년 조빔은 보사노바의 효시로 불리는 노래, Chega de Saudade를 녹음하면서 한 뮤지션을 끌어들였는데,
그가 바이아 지방 출신의 조앙 질베르또 (Joao Gilberto)였다.
조앙 질베르또는 다른 기타리스트와는 차이가 나는 독특한 리듬을 연주했는데,
‘바라손’이라는 바이아 지방의 이 리듬은 보사노바의 원점을 제공했다.
싱코페이션이 많으면서 리듬과 멜로디를 동시에 연주하는 기타, 그리고 음정이 맞지 않는 듯이 속삭이는
조앙 질베르뚜의 노래는 보사노바만의 특징을 확립시켜줬다.
조앙 질베르또가 가져온 바라손 리듬에 아주 느린 보컬 삼바 음악인 Samba Cancao (쌈바 깐싸웅)과
당시에 라디오가 보급되면서 유행하던 미국의 모던 재즈가 결합하면서 새로운 음악 장르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쿨 재즈라고도 불렸던 이 장르는 노래, Desafinado (Off Key)에 나오는 가사 Bossa Nova로 대체됐고,
삼바를 혐오하던 브라질 백인 상류층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음악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 때 활동하던 브라질 보사노바의 초기 뮤지션들로는 보사노바의 뮤즈로 불렸던 Nara Leao (나라 레아웅)을 비롯해
Carlos Lyra (까를로스 리라), Roberto Menescal (호베르뚜 메네스까우),
Maria Creuza (마리아 끄레우자), Toquinho (또낑유), Baden Powell (바덴 포웰), Sergio Mendes (세르지오 멘데스) 등이 있다.
보사노바의 위기와 변호ㅏ 브라질 정치 환경의 변화 때문에 보사노바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현실을 외면했다는 이유로 보사노바 뮤지션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좌파 군부 독재가 시작된 1964년 이후에는 보사노바 뮤지션들 사이에도 분열이 나타나, 일부는 저항을 택했고, 일부는 망명을 택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브라질내의 보사노바의 열기는 급속하게 식어버렸고, 브라질 뮤지션들이 대거 이동해 간 외국, 특히 미국에서 보사노바는 새로운 붐을 일으켰다.
안토니오 까를로스 조빔의 카네기홀 공연으로 시작된 브라질 보사노바의 미국 공략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조앙 질베르또는 재즈, 세르지오 멘데스는 팝 분야에서 보사노바를 미국 음악계에 정착시켰다. 게다가 미국의 재즈 뮤지션들의 보사노바에 대한 호감은 보사노바의 세계 전파에 큰 기폭제가 되었다. 스탄 게츠 (Stan Getz)와 찰리 버드 (Charlie Bird)의 [Jazz Samba], 폴 윈터 (Paul Winter)의 [Jazz Meets the Bossa Nova], 허비 맨 (Herbie Mann)의 [Do the Bossa Nova with Herbie Mann] 같은 대가들의 연이은 보사노바 앨범 발매는 보사노바를 세계적인 음악 장르로 만들어줬고, 스탄 게츠와 조앙 질베르또뿐 아니라 조빔과 당시 조앙 질베르또의 아내였던 아스뜨루드 질베르또 (Asturd Gilberto)가 참여했던 보사노바를 대표하는 명반 [Getz/Gilberto] (1964)는 빌보드 앨범 차트 2위까지 오르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 앨범이 아쉽게 정상을 차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비틀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 때문이었다. 비틀즈의 열풍 속에서 거둔 [Getz/Gilberto]앨범과 수록곡 The Girl from Ipanema의 대성공은 보사노바의 질긴 생명력을 예고하는 신호가 아니었나 싶다.
조빔을 비롯한 브라질 작곡가들의 1950, 60년대 보사노바 명곡들은 스탠다드 넘버로 전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다. The Girl from Ipanema를 비롯해, Desafinado, Corcovado (Quiet Night of Quiet Stars), Insensatez (How Insensitive), Aguas de Marco (Waters of March), Samba de Uma Nota So (One Note Samba), Vou Te Contar (Wave)… 올디스 재즈 넘버처럼 전세계 가수들의 레파토리가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경향’ 이었던 보사노바는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이 아니다. 과거의 영광에 안주해서 변화를 거부하는 정체된 음악이 되어 버렸다. 조빔과 비니시우스 그리고 조앙 질베르또라는 창시자가 비교적 명확한 이 장르는 2000년대에 들어서야 진화를 위한 발걸음을 떼고 있다. 근원지는 역시 고향 브라질이다. 일렉트로니카와 결합된 보사노바, 일렉트로닉 보사노바 혹은 누보사 (Nu?Bossa) 뮤지션들, 쎌수 폰세까 (Celso Fonseca), 베벨 질베르또 (Bebel Gilberto : 조앙 질베르또의 딸), 마리자 몬찌 (Marisa Monte), 그룹 보싸꾸까노바 (Bossacucanova) 그리고 클래시컬 보사노바를 추구하는 자키스 모렐렌바움 (Jacques Morelenbaum), 아방가르드 전위 음악으로 폭을 넓히고 있는 아르토 린제이 (Arto Lindsay), 보사노바를 더욱 더 재즈쪽으로 밀착시키고 있는 호자 빠쏘스 (Rosa Passos) 등이 보사노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만들어진 여유로운 음악이라서 그럴까? 보사노바는 왠지 모르게 풀어지고 싶을 때 선택하게 되는 음악이다. 보사노바를 기왕이면 콧소리가 들어간 부드러운 브라질식 포르투갈어로 부른 곡으로 들어보자. 어쩌면 꿈결에 리우데자네이루 아파네마 해변의 매력적인 여인을 만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에반겔리온에 나오는 엔딩타이틀 Fly Me to the Moon은 가장 유명한 재즈 보컬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절반만 맞다.
이 노래는 사실 재즈 보컬곡이기 이전에 보사노바이기 때문이다.
Antonio Carlos Jobim과 Gilberto 그리고 Stan Getz의 앨범 역시 가장 많이 팔린 재즈명반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보사노바이다.
보사노바는 브라질 음악이면서 재즈로 분류되는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데 ,
재즈 사조라한다면 일반리스너들이 가장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가장 상업성있고 편한 재즈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보사노바-1950년대 말기에 브라질의 도회풍 삼바에서 재즈의 영향을 받아 파생한 포퓰러뮤직.
보사노바라는 말은, J. 질베르토의 연주양식에 대해서 A.C. 조빙이 명명한 것으로서, <새로운 감각> <새로운 경향>을 뜻한다.
삼바에 대한 보사노바의 혁신성은, 삼바의 리듬을 기초로 한 리듬구조와 브라질의 구상시(具象詩)와 유사점을
갖는 가사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또한 보사노바에서는 선율·화성·리듬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으며,
반주악기의 주력인 기타는 화음을 리듬적으로 울리듯이 연주한다.
창법의 특징으로서는 전통가요의 창법을 받아들여서 콧소리로 억양을 붙이지 않고 거의 이야기하는 것 같은
가락으로 노래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기타연주법과 창법의 고안은 질베르토에 힘입은 바가 크다.
보사노바는 재즈와 브라질의 로컬음악과의 결합된 재즈의 한 축으로서 현재 세계에서 널리 불려지고 있다.
음악의 기본적인 틀은 라틴풍의 흥겹고 즐거운 음악을 지향하며 본토 브라질의 보사노바의 경우 미국에서 불려진 보사노바와 달리
영어와 브라질어(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로 불려진다.
많이 알려진 보사노바곡의 대부분이 브라질 중에서도 세계 3대 미항으로 알려진 리오 데 자네이루의 지명으로 되어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보사노바의 창시자인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빙, 조앙 질베르토, 아스트루드 질베르토 등이
모두 리오 데 자네이루 출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사노바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리오 데 자네이루의 풍광과 함께
음악을 들으면 더욱 느낌이 온다. 보사노바와 함께 리오 데 자네이루를 사진으로 기행 해 보자.
Corcovado
Corcovado
작년에 新 세계 7대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정된 리오의 예수상. 이 예수상이 있는 언덕의 이름이 바로 Corcovado 이다. Corcovado는 해발 790m의 리오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이며 그 산봉우리의 정상에는 30m 높이의 팔 벌린 예수상이 서 있다. 리오데자이네루의 가장 대표적인 랜드마크이며 나아가 브라질을 대표하는 석상이다. 리오 데 자네이루공항에서 보타포고와 해안을 끼고 순환하는 도로 및 해변, 리오의 도심 어느 곳에서나 Corcovado를 볼 수 있으며 리오를 찾는 모든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는 관광코스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Corcovado 정상에서는 리오의 모든 곳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기차와 자동차를 이용하여 거의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어있다.
Getz/Gilberto에는 가장 유명한 보사노바곡 중에 하나인 Corcovado(Quiet Nights And Quiet Stars)가 있는데, Jobim이 작곡했으며 스탄겟즈와 남편인 Joao Gilgerto가 연주하고 아내인 Astrud Gilberto 가 보컬을 맡았다. 조용하고 감미로운 아스트루지의 목소리가 이곳의 분위기와 딱 어울린다.
Ipanema
레스토랑 Garota de Ipanema
보사노바 최대의 히트곡인Girl From Ipanema, ‘이빠네마 소녀’라는 이곡의 원곡명은 Garota De Ipanema 로서 그 뜻은
‘이빠네마의 아름다운 여인’이다. 여기서 Ipanema는 Copacabana 해변과 함께 남미최고의
해변으로서 하얀 모래사장과 깨끗한 물, 한적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안토니오 칼를로스 조빙과 조앙 질베르토가 살던 동네이기도 하다.
Girl From Ipanema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하자면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빙이 이빠네마의 한 레스토랑에서 악상을
구상 중이었는데 창밖으로 너무도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가 지나갔고 그 아가씨의 모습과 움직임에
영감을 받아 그 레스토랑에서 즉석해서 작곡한 곡이다.
3슬픈 선율의 아일랜드
너무나 아름답고 맑고 청순한 소리를 가진 케이트 퍼셀(Kate Purcell)의 노래는 아일랜드의 음악적 전통과 맞닿아 있으며 아일랜드의 향수와 아련한 어린 시절의 동경, 그리고 아름다움을 들려준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는 아일랜드 음악을 담아내기에 적당하며 주로 백파이프, 기타, 피들등의 반주로 부르는 그녀의 노래에는 고풍스러운 풍부한 정감과 선율이 담겨있으며 눈물이 솟아오를 듯한 애틋함과 그리움이 가슴을 적시는 듯 하다.
Kate Purcell Shadow of You](Dream, DR CD 005, 2002)
아일랜드의 클레어(Clare)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성 아티스트 케이트 퍼셀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이다. 아일랜드의 지도를 펼치면 클레어 지방이 아일랜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고 실제로 심장지대(Heartland)라고 불린다.
이런 지리적 배경을 볼 때 이 지방 출신의 아티스트의 음악이 아일랜드 음악 문화의 ‘진국’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점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즉, 기타가 이끌고 보우란(아일랜드의 북)이 받쳐주는 사이사이로 백파이프와 바이올린과 휘슬이 등장한다. 물론 편곡이나 프로듀싱이 전통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사운드가 질박한 맛을 더 강하게 했으면 좋았을것이라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소리가 매우 매끄럽다. 그렇지만 현대적으로 윤색된 속에서도 아일랜드 특유의 정서를 느끼기는 어렵지 않다. 일단 앨범 수록곡 가운데 절반 정도가 전통 음악으로 채워져 있고, 그 가운데 두 곡 Ar Eireann Ni Neosfainn Ce Hi와 Slan Abhaile은 영어와 게일어 가사로 부르고 있다.
전통 민요, 즉 아이리시 트래디셔널이 아니라 새롭게 창작된 곡, 즉 아이리시 컨템퍼러리(Irish Contemporary)의 경우도 팝송의 후렴구의 역할은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Lullaby나 once I Loved 등은 20년전 쯤 에밀루 해리스나 제니퍼 원스가 부른 컨트리 곡처럼 들려서 앨범에 탄력을 주고 있다. Love Me Tender의 기원이 되는 곡인 Nora Lee도 흥미롭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아일랜드산(産) 음악 특유의 슬픈 정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신기하다.
켈틱 음악이란
켈트 음악은 아일랜드를 비롯한 프랑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서 성행했던 켈트 족의 전통 음악이다.
이것이 휘슬과 피들로 상징되는 아일랜드 음악(Irish Music)으로서든, 백파이프 또는 가이타(Gaita;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서
사용되는 백파이프의 일종. 카를로스 누니에스 등이 연주하는 악기이다)가 사용되는 스코틀랜드와
갈리시아 지방의 지엽적 음악으로서든, 켈트 음악은 이제 월드 뮤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그러나, 월드 뮤직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의 유럽 등지의 상황을 고려할 때,
월드 뮤직이라는 장르적 정의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켈트 음악은 유럽인들과 유럽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 만든 미국과 캐나다에서 사랑받았던 음악 장르이다.
켈틱음악 아티스트들
영미권 팝, 록 음악에서 두각을 나타낸 수많은 아일랜드 출신 아티스트들을 살펴보자.
게리 무어(Gary Moore), 씬 리지(Thin Lizzy), 유투(U2) 등은 분명 켈트 음악을 연주하던 아티스트들은 아니었지만,
이들의 음악이 유독 록 필드에서 독특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형식적으로는 록 음악의 모양을 안고 있었어도
이들의 음악 속에서 흐르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정서가 '시끄럽고 장황한' 하드 록이나 메틀, 모던 록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유독 빛났기 때문이리라.
이들을 아일랜드 - 켈틱 음악의 원시적 형태로 따로 차치하더라도,
이후 70년대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수많은 영미권 팝 음악 시장에서의 아티스트들을 살펴보면,
켈트 음악의 약진은 더욱 두드러진다.
로리나 맥케닛(Loreena McKennitt), 시니어드 오코너(Sinead O'Conner), 매리 블랙(Mary Black), 엔야(Enya) 등을
편의상 '메인 스트림'으로 분류한다고 해도,
트리 얀(Tri Yann), 클라나드(Clannad), 알탄(Altan), 치프턴스(Chieftans), 알랑 스티벨(Alan Stivell), 카를로스 누니에스(Carlos Nunez) 등은 분명 켈트 음악의 선봉으로서 켈트 뮤직의 성격을 정의 내릴 수 있는 켈트 음악 전문 아티스트들이다.
이들은 아일랜드 출신 선배들의 록-하드 록-헤비 메탈이라는 양식보다,
보다 본질적으로 켈트 음악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음악들을 선보였던 사람들이다.
아일랜드-켈틱 하프나 휘슬, 피들 등의 켈트 전통 악기들을 사용해 목가적이고 전원적이며,
또한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개념인 '신비함'을 안고 있는 음악들을 최근 수십 년 동안 선보였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켈트 음악은 대중 음악의 주류로 편입되었고, 사회 문화의 다양한 발전을 통해 대중 음악에서
사용되는 악기들과 융합되면서 새로운 편성을 거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 더 코어스(The Corrs)를 비롯한 수많은 대중 음악 밴드들은 현대 켈트 음악의
제 4세대로서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켈틱 우먼(Celtic Woman)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아일랜드 여성 그룹으로 보컬을 맡고 있는 클로에 애그뉴, 올라 펠론, 리사 켈리, 알렉스 샤프, 그리고 피들 연주자인 메어리드 네스빗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연주 음악은 켈틱 음악에서 현대 음악까지 망라한다. 지금까지 세 개의 음반을 출시 했는데 Celtic Woman: A Christmas Celebration, 그리고 Celtic Woman: A New Journey이며, 다수의 월드 투어를 병행해 왔다. 켈트 음악을 아일랜드와 유럽 외부 세계에 알린 것은 무대 공연 리버댄스와 댄스의 제왕를 통해 에냐와 클라나드)가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켈틱 우먼은 "Riverdance for the voice"로 불리기도 한다.
음반
켈틱 우먼은 2004년 9월 15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위치한 헬릭스의 만원 관중 앞에서 진행한 공연이 PBS TV로 방송되었다. 프로듀서인 샤론 브라운(Sharon Browne), 회장 겸 CEO인 데이브 케바나흐(Dave Kavanagh) 그리고 음악 감독이자 작곡가인 데이빗 다운스(en:David Downes)에 의해 준비된 이 공연은 미국에서 2005년 3월에 PBS 방송에 의해 처음으로 방송되고, 몇 주만에 첫번째 데뷔 음반 켈틱 우먼 (Celtic Woman)이 빌보드 차트의 세계음악 부문에 1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2006년 7월 22일에는 68주를 유지하며 최장기간 1위 유지라는 기록을 세웠고, 무려 81주간 동안 이 자리를 지켰다. 켈틱 우먼의 성공은 2005년 동안 PBS 방송이 크게 성장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en:The Helix에서의 라이브 공연은 스튜디오 앨범과 함께 DVD로 발매되었다. 2006년 10월 19일 발매된 두 번째 음반 Celtic Woman: A Christmas Celebration이 첫 번째 음반을 세계 음악 차트에서 2위로 밀어내며 1위 자리에 등극한다.
세 번째 음반을 준비하는 동안 2006년 8월 23일과 8월 24일에 걸쳐 아일랜드 en:County Meath에 있는 en:Slane Castle에서 공연을 갖게 되는데 2006년 12월에 PBS 방송을 통해 방송되었다. 2007년 1월 30일에는 스튜디오 음반 Celtic Woman: A New Journey이 발매와 함께 공연 실황이 DVD로 동시에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바로 빌보드 200 차트에 4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고 세계 음반 챠트에서 이 전 발매된 두 개의 음반을 한 자리씩 아래로 밀어내며서 1위에서 3위를 모두 차지한다.
2006년 en:Slane Castle 공연의 뜨거운 인기를 반영하여, 2007년 12월 7일 PBS 방송에서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The Helix Theatre에서 진행된 특별 공연 실황을 중계했다. 이 공연은 두 번째 음반인 en:Celtic Woman: A Christmas Celebration에 있던 노래들도 포함하고 있다.
구성원(Membership)
최초 멤버는 클로에 애그뉴(Chloë Agnew), 올라 팰런(Órla Fallon), 리사 캘리(Lisa Kelly), 메이브(Méav Ní Mhaolchatha),
그리고 메어리드(Máiréad Nesbitt)였다. Ní Mhaolchatha가 임신 중 이었던 2005년 동안,
샤논(en:Deirdre Shannon)이 월드 투어 기간 그의 공백을 대체했었다.
Shannon은 2006년 2월 그룹을 떠났고, 메이브가 A New Journey를 녹음과 투어를 위해 그룹에 복귀했다
. en:Hayley Westenra가 8월 24일에 팀에 공식적으로 합류한다는 언급이 있은 뒤,
그룹의 두번째 구성이 2006년 9월 6일 공표된다. Westenra는 A New Journey 음반과 DVD 녹화에 참여했을 뿐아니라,
5명의 라이브 인원을 유지하기 위해 메이브와 번갈아가며 투어에 참여하게 된다.
2007년 8월 20일, 메이브는 솔로 생활을 위해 켈틱 우먼을 떠난다고 발표했다.
메이브를 대신하는 린 힐러리가 미국 플로리다의 Estero에서 있었던 2007년 10월 10일 공연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2007년 12월, Kelly가 2008년으로 예상되는 출산을 위해 휴가를 떠났다.
Alex Sharpe가 이 공백 기간 동안 A New Journey 투어에 모습을 나타낼 예정이다.
어떻게 그룹 구성원이 의기투합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리사는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 조화롭게 지낼 수 있어요.
클로에는 쾌활하고, 메이브는 합리적이며, 올라는 천사와 같고, 메어리드는 열정적이죠"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4영혼의 음악 인도
인도음악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역사와 전통을 잘 알아야 한다.
6,000여 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었는데 몇몇 종족들의 선율과 리듬은 고대에서
전래된 요소들을 보존하고 있으며 보다 발전된 많은 민속음악도 농경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요소들의 본질적 특성은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선사시대에 이미 예술적인 민족의 수준 높은
문화들이 나타났는데 수메르인과 관련된 이 민족은 인더스 계곡에 초기 하프를 가져다주었다(BC 2500~1500).
베다와 초기 고전적 전통(BC 1500?~259?)
서아시아로부터 종교적 가르침과 의식을 갖고 인도에 도착한 아리아인들은 나중에 그것을 4권의 '베다'(Veda : 지식)에 기록했다.
〈리그베다 Rigveda〉(찬가의 지식)·〈사마베다 Sāma veda〉(성가의 지식)·〈야주르베다 Yajur veda〉·〈아타르바베다 Atharva veda〉라고 불리는 4권의 베다는 각각 그 나름의 낭송 양식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가사들이 중요성을 지니는 〈리그베다〉는 3개의 음높이 악센트로 엄숙하게 낭송되는데
그 기본 형식은 아직도 힌두 사원에서 사용되고 있다. 반면 가사의 역할이 단지 음성을 실어나르는 도구에 불과한
〈사마베다〉는 다소 정교한 선율을 가지고 있다. 베다의 전통은 이미 가무잡잡한 피부색의 드라비다족들에 의해
보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누리고 있던 남인도 전통 노래들과 약 2,000년 전의 세속음악 발전에 공헌했으며
이것은 후대에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 라가를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인도 최초로 알려진 음악이론가인 바라타는 극장예술에 대한 그의 저서 〈나티아 샤스트라 Nāṭya śāstra〉
(BC 6세기경)에서 총 6개의 장에서 음악을 다루고 있다. 산스크리트로 상기타라 불리는 고전예술은 인도음악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성인음악인 '기타', 부수적인 위치에 있는 기악음악인 '바디아',
그리고 '느르티아'라는 춤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원에서 추는 남인도의 전통무용 바라타나티아는 베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반면 케랄라의 무용극인 카타칼리는 보다 후대의 형식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고대 힌두의 서사시
〈라마야나 Rāmāyaṇa〉(BC 5세기경)·〈마하바라타 Mahābhārata〉(BC 400~AD 400)에서 영감을 받았다.
라가의 고전적 체계와 중세
헬레니즘과 불교가 지배하던 시대(BC 250?~AD 600)에는 고전적 전통이 다소 주춤했으며 이후에 종교 부흥 시대가 도래했고
인도는 다시 한번 힌두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비록 음악의 기본형식은 여전히 성악이었지만
여러 형태의 북들이 오래도록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사원의 조각들을 보면 류트류나 피들류에 속하는 새로운 악기들이 등장했다.
다양한 이들 악기들은 대규모 합주로 연주되지 않고 독주나 소규모 합주로 연주되었다.
음악이론가들과 저술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마탕가의 〈브리하드 데시 Brihad Deshi〉(8세기 또는 그 이전),
나라다의 〈나라디야 시크샤 Naradiya Shiksha〉(10세기 또는 그 이전), 사릉가데바의 〈상기타 라트나카라 Saṁgita Ratnakara〉(13세기초)를 비롯한 고전이론에 관한 주요저서들이 저술되었다.
이론
인도음악에도 음들의 완전한 순환으로서의 옥타브(saptaka : 7개의 집합) 개념이 있는데 서양의 음계처럼 '사·리·가·마·파·다·니'라 불리는 7개의 음(svara)으로 구성된다.
옥타브는 다시 음정관계가 거의 균등한 22개의 미분음인 슈루티로 분할되는데 이 미분음들이,
셋 혹은 넷으로 다양하게 무리져 음정관계를 형성하면 다양한 음계와 선법이 만들어진다.
전통이론에서는 7음(Sampurna : 완전한)으로 구성된 2개의 기본 음계(grāma)와 6음음계·5음음계도 있었다.
이중 사 그라마(Sa grāma : 4324432)와 마 그라마(Ma grāma : 4342432)는 일련의 상행 슈루티 음들로 구성된다.
이들 음계에서의 첫번째 숫자 4는 '사'(으뜸음)와 '리' 사이가 아니라 아래 '사'와 '사' 사이에 있는 슈루티들의 수를 나타낸 것이다
. 하나의 음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7음들이 각각 으뜸음이 되는 7개의 선법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사 그라마'와 '마 그라마'라는 2개의 음계에서 '무르카나스'(mūrcchanās : 확장)라고 부르는
14개의 선법이 유도되며 그들 가운데 7개는 실제로 사용된다. 또한 이들로부터 7개의 주요 자티(jātis)와
11개의 혼합 자티가 나오는데 이것은 실제 선율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선율세포로 독특한 위계구조를 지닌다.
자티는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진 라가(rāga)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통상적으로 132개의 라가가 사용되고 있다.
라가는 동양적인 특징을 지닌 일종의 선율형이며 각각의 라가는 선율에 유연함을 주는 섬세한 장식음의 선택,
그것의 음계와 특징적인 선율 윤곽인 테시투라(tessitura), 으뜸음에 대비되는 특정음 바디(vādῑ)의 강조에 의해 구분된다.
원래 '음색'·'느낌'의 뜻을 지닌 라가는 어떤 라가를 언제 연주하느냐에 따라 사람에게 고유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생각되었다.
이 개념은 일찍이 고대 아리아인들이 느낌의 종류를 분류했을 때부터 있었지만
라가라는 명칭이 처음 발견된 것은 8세기부터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라가들로 낮과 밤의 서로 다른 시간들에
적합한 기분들을 표현했고 나중에는 행성들과 원소들에 대한 암시뿐 아니라 라가의 옳고 그른
사용법에 관계된 신화도 생겨났다. 인도인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상징작용은
그림의 형태로 라가의 본질을 전하는 전통 회화에서 나타난다.
연주에서 라가는 탈라(tāla)라는 단위박자를 필요로 한다.
남인도 전통음악에는 각각 5개의 형태를 가진 7개의 주요 탈라가 있다. 하나의 탈라는 일정한 수의 박(拍)과 일정한
강세와 길이(긴 것과 짧은 것)의 패턴을 갖는다. 서양음악의 4/4박자와 같이 단순한 것과 비대칭적인 것이 있으며
그 음악의 리듬이 시작되는 출발점 탈라는 통상적으로 북으로 연주된다.
탈라의 완결된 시간 단위 안에서 2명의 연주자(가수와 북 연주자, 또는 기악 연주자와 북 연주자)는 리듬에 변화를
주면서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지만 새로운 탈라 단위가 시작하는 첫 박자인 삼(sam)은 서로 일치되어야 한다.
형식적으로 완전히 갖추어진 인도음악에서 처음 나오는 부분은 북 반주 없이 자유롭고 느리게 연주하는 일종의 전주곡인 알라파이다.
알라파에서 연주자는 라가의 구조로 들어가는 그의 길을 감지하게 되며 이밖의 주요모습을 확립하게 된다
. 그런 다음 음악의 주요몸체인 가트(ghat)가 이어지는데 그때 탈라의 체계에 의해 북이 처음으로 연주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이 부분은 주로 보통 빠르기로 연주된다. 여기서 탈라의 반복되는 시간단위는 형식 구조의 기초가 된다.
하나의 라가를 연주하는 시간이 단 몇 분에서부터 2시간 또는 그 이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트와 알라파의 비율도 정해져 있지 않다.
인도음악의 리듬 구조를 이루는 2개의 요소인 라가와 탈라는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으뜸음의 역할을 하는 드론에 의해 완결된다.
인도음악에는 조바꿈이 없기 때문에 드론은 고정되었으며 종종 탄부르라 불리는 목이 길고 줄받이가 없는 류트족 악기로 연주한다.
탄부르의 4현은 통상적으로 5도(때로는 4도)-옥타브-옥타브-기본음으로 조율하는데
이 현들을 돌아가며 차례로 계속 연주하여 일정한 반향 시간을 갖게 되면 음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
배음이 풍부한 이 음향은 라가와 탈라를 위한 화성적 틀을 제공한다.
하지만 화성적으로 더 많은 것들이 도입되었다면 인도음악 체계의 순수한 선율·화성 간의 균형이 깨졌을 것이다.
특정 시간에 부합하는 라가를 선택하기 위해서 연주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창조적 성향을 라가의 법칙에 종속시키지만
규정된 틀 안에서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기술을 연마한다. 사실 라가 연주자는
서양음악 연주자들에 비해 훨씬 독창적이어야 한다.
이슬람의 영향과 북부와 남부의 전통(1000경~1700경)
라가의 법칙은 인도 전역에서 통용되지만 실제 음악에서 어떤 라가를 선택하느냐와 연주양식은 북부와 남부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민족의 이동이 항상 이전의 원주민들을 남쪽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부는 인더스 계곡과 그리스적 불교 문화, 페르시아 제국(BC 5~4세기), 파르시교도,
아라비아의 구자라트 통치시대(8세기) 등으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에 정복당했을 때에는 이미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영향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새 통치자들은 음악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고 그결과로 음악은 무굴 제국 말기 악바르 황제 치하(1542~1605)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남인도에서는 이슬람의 영향에 비길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사실 아리아인의 형식에 그의 대부분 드라비다인의 내용을 지닌 남부의 카르나타카 음악은 숭고하며 절제된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 카르나타카 음악). 반면 이미 아리아인과 힌두인이 결합된 북인도의 힌두스탄 음악은
페르시아와 중동으로부터 새로운 선율과 양식을 흡수해 세속적 분위기와 함께 새로운 생동감과 기품을 얻었다
(→ 힌두스탄 음악). 또한 특정 악기들을 선호하기도 했다.
고대에서부터 비롯된 대다수의 인도악기 중 몇몇은 토착 악기이지만 그 대부분은 중동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아니면 힌두인의 옛 악기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새로운 악기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다.
현악기 가운데 뜯는 현악기로는 비나(특히 남인도에서 연주됨)와 시타르, 사로드(특히 북인도에서 연주됨) 등이 있고,
켜는 현악기로는 사랑기와 에스라즈, 보다 최근에는 유럽에서 들여온 바이올린(특히 남인도에서 연주됨)이 있다.
목관악기로는 가로 피리, 세로 피리, 숌, 샤나이(북부), 나가스바람(남부), 의식용 소라고둥,
땅꾼의 리드 파이프 등이 있다. 북은 그 종류가 상당히 많은데 그 중에는 다이나(dahinā)와
바이나(bahinā)의 쌍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타블라
(북부), 음리당가(남부), 모래시계 모양의 북인 다마루, 채로 치는 드럼인 돌과 돌락, 케틀드럼인 나키라가 있다.
그밖에 몸울림악기에 속하는 악기로는 여러 형태의 심벌즈·종·딱딱이가 있다.
Sitar(시타르)
Sursanga(수르산가)
Sarangi(사랑기)
Tambura (탐부라)
Sarinda (사린다)
Dholaka( 도라카)
Mayuri (Peacock)(마유리-공작)
Dhodro Banam(도드로 바남)
Vina (bin) 비나(빈)
무굴 제국이 쇠퇴하는 동안 인도에 대한 영국의 영향이 커졌으며 영국의 통치(1757~1947)는 인도의 음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봉건제도의 쇠퇴와 이에 따른 음악적 후원의 쇠퇴는 음악가들의 지위를 떨어뜨렸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예술성도 낙후시켰다.
이것은 19세기 들어 더욱 가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완전히 발전된 선법적 체계에
서양음악의 화성을 슬그머니 끌어들이려는 잘못된 시도와 아울러 하모니엄같이 평균율로 조율된 악기들을 도입하려 한 데 그 원인이 있다.
슈루티 박스(śrutibox)가 이러한 시도의 결실이며 지금은 전통적인 타블라가 드론 악기로서 이 악기를 대신하고 있다.
현대적 삶에 적응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인도의 음악가들은 그들의 전통을 보존하려는 쪽과
서양의 이상을 따르려는 쪽의 양 극단 사이에 있다. 대중음악의 차원에서 서양의 춤과 영화음악의 영향은
전통음악의 완전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라가 음악의 운명은
아직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몇몇 대표적인 라가 음악 전문가들은 그들이 서양을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음악의
영향을 받아 서양음악의 작곡법을 배워 여러 가지 혼합된 양식의 음악을 작곡했으며 또 다른 작곡가들은 라디오나
연주회장에 적합한 양식들을 찾으려 하고 있다.
인도음악은 다른 지역의 음악에 주기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서력기원이 시작된 처음 몇 세기 동안 인도음악은 불교와 함께 티베트·중국·한국·일본에 전해졌으며
그곳에 현존하는 형식들은 아직도 그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8세기 이후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의 힌두인들은 이 특정 지역의 음악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은 미얀마와 시암(지금의 타이)에서는 배 모양의 하프로 남아 있고 발리에서는 특정 음악형식으로 남아 있다.
집시들은 인도의 라가를 아라비아와 유럽으로 전했다.
20세기 중반에 인도의 전통 음악가들은 유럽과 미국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녹음한 음반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연구의 수단이 제공되고 있다. 인도의 전통음악은 현재 전해내려오는 동양의 위대한 전통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서양음악가들도 인도의 전통음악을 배우려 하고 있다.
Candan Ercetin - Sensizlik
1963년 2월 10일 터키 Kirklareli에서 출생
1986년 유로비젼 송 콘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에
터키의 대표였던 Klips ve onlar 그룹의 멤버였으며
프랑스에서 출간된 앨범을 포함
몇 개의 뮤직앨범을 가지고 있다.
그밖에 많은 뮤지컬에도 참여했는데
터키에서는 위대한 성악가로 명성이 높으며
특히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그녀의 상징처럼널리 알려져 있다.
bir garip hüzün çöker insana el ayak çekilince
tek başına kalırsın dünyada etraf sessizleşinceinan bu ev alışamadı hiçbir zaman sensizliğe
şimdi sensizlik oturuyor kalkıp gittiğin yerde
yalnızlığa elbet alışır bedenim yalnızlıkla belki de başa çıkabilirim
çok zor gelse bile yaşar öğrenirim sensizlik benim canımı acıtan
bir derin korku düşer ruhuma duvarlar seslenince
karanlık oyun oynar aklıma gölgeler dans edince
inan bana alışamadım hiçbir zaman sensizliğe
şimdi sensizlik dolaşıyor çıkıp gittiğin bu evde
너는 기울 수 없는 비탈진 가슴의 그대 외로움이 스며들 때면 서늘한 고독의 날을 세우고 나그네 길로 떠나라 영원으로부터 태어나 태초의 외로움과 맞닥뜨리고 천 갈림길 만 갈래로 유영하는 바다를 보라 당장이라도 숨이 끊길 듯 소용돌이치는 외로움의 불이 아니곤 잠재울 수 없는 감정 같으리니
아, 그대 외로움이 스며들 때면 외로운 넋 붉게 접어 넓은 바다 깊은 수심으로 은밀히 수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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