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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시대의 명화 1 본문

##겔러리##/ART겔러리

[스크랩] 조선시대의 명화 1

dhgfykl; 2008. 7. 4. 20:18

작가 : 강희안(姜希顔)
아호 : 인재(仁齋)
제목 :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언제 : 15세기 중엽
재료 : 종이에 수묵
규격 : 23.4 x 15.7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강희안은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과 인수부윤(仁壽府尹)등을 지낸 조선초기의 가장 대표적인 선비화가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다. 인재(仁齋)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이 하나 찍혀있는 이그림은 비록 소품이긴 하지만. 그의 명성을 실감케해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공수(拱手)의 자세로 바위 위에 턱을 괸채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있는 고사(高士)의 모습이 덩굴풀 드리워진 암벽아래서 화면의 초점을 이루고 있다. 화의(畵意)의 핵심을 이루는 고사의 초탈한 자태는 무상한 세상사를 피해 자연속에서 심성을 양성하고자 했던 당시의 선비들의 고아한 풍모를 보는듯 하다. 화중 인물의 배경을 덩굴풀이 매어달린 암벽으로 막아 놓은 구도는 남송 이래의 수묵나한도(水墨羅漢圖)나 백의관음도 등의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계통에서 즐겨 채택했던 것이며. 쇄찰(刷擦)에 가까운 농묵의 뭇질로 대담하고 종일하게 구사된 묵법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서예적 필획이 느껴지는 옷주름선의 힘찬 필치는 남송대 양해(梁楷)의 절려묘(折藘描)와 마원(馬遠)의 궐두묘(獗頭描)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구도와 강렬한 필묵법이 명대의 오위(吳偉)와 장노(張路)등에 의해 받아들여져 후기절파계(後期浙派系) 소경산수인물화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데. 이 그림은 이미 고려시대에 전래되어 형성되었던 전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고사의 깊은 정관(靜觀)의 경지를 활달하고 창윤(蒼潤)한 묵기(墨氣)로 승화시킨 이 그림의 화풍은 조선 중기의 절파계 소경산수인물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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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강희안(姜希顔)
아호 : 인재(仁齋)
제목 : 산수도(山水圖)
언제 : 15세기 중엽
재료 : 족자비단에 담채
규격 : 96.5 x 52.5 cm
소장 : 도교국립박물관

해설 : 이그림은 근경으로 부터 중경을 거쳐 후경의 주산(主山)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깊이감. 근경과 중경의 경물(景物)들이 이루는 x 자형의 구성. 유기적인 연결을 염두에 둔 구도등이 돋보이는 그림으로 산이나 바위의 묘사에서 보이는 필묵법(筆墨法)과 준법(皴法). 안개에 쌓인 중경의 마을 표현. 수지법등(樹枝法)등에는 안견파 화풍의 접촉이 약간씩 감지된다. 고사관수도 와는 차이가 많이나는 작품이지만 근경의 큰수목은 그의동생 강희맹(姜希孟)의 독조도(獨釣圖)에 보이는 고목(枯木)들과도 형태상 비슷하여 주목된다. 조선초기 산수화의 또다른 일면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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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강희맹(姜希孟)
아호 : 국오(菊塢),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제목 : 독조도(獨釣圖)
언제 : 15세기 중엽
재료 : 족자비단에 담채
규격 : 96.5 x 52.5 cm
소장 : 도교국립박물관

해설 : 강희맹은 조선시대 초기 선비화가로서. 역시 세종조(世宗祖)연간에 화단(畵壇)을 선도한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의 동생이다. 자(字)는 경순(景醇). 호(號)는 국오(菊塢),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무위자(無爲子), 만송강(萬松岡)등을 사용하였다. 세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서. 화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송(松). 죽(竹)을 잘 그린 것으로 전해온다. 만년에는 도화서(圖畵署)의 장인 제조(提調)까지 중임하였고. 성종(成宗) 14년에 화원인 서문보(徐文寶)를 9품으로 천거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현존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시피 하며. 여기에 소개한 그림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우측상단의 오언시(五言詩) 내용으로 보아 춘경(春景)을 묘사한 그림으로 강안의 말라죽은 교목(喬木) 두 그루를 중심으로 갈대숲. 강위의 배와 인물. 대안(對岸)의 모래언덕등 강가의 근경만을 화려하게 담았는데. 뛰어난 묘사력으로. 쌀쌀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봄의 스산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였다. 강가 갈대숲 아래 배를 정박한 고사는 낚싯대를 걷어올린채 노에기대어 대안을 응시하며 상념에 잠겨있다. 이런 점경(點景) 인물의 고사는 선비들의 은일사상을 반영한 소재라 할수있다. 능란한 수묵 구사의 경물 처리는 선비화가의 여기적(餘技的) 표현을 벗어난 수준급이며. 조선시대 초기의 회화에서 돋보이는 가작(佳作)의 면모를 잦추었다. 화풍은 초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먹의 농담변화와 번지는 효과를 이용한 나무의 입체적 표현 및 갈대숲과 대안의 모래언덕과 인물묘사 등 빠른 붓질의 대범한 수법. 그리고 전체적으로 진한 수묵의 괴량감(怪量感)은 선종화적(禪宗畵的) 표현을 연상시킨다. 그려면서도 근경만을 압축시킨 화면구성은 남송 원체풍(院體風)이며. 언덕에 비스듬히 선 두 묘목의 날카롭게 뻗은 가지 끝의 표현은 원대 이간(李衎)의 화풍과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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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상좌(李上佐)
아호 : 학포(學圃)
제목 : 어가한면도(漁暇閑眠圖)
언제 : 15세기 말
재료 : 비단에 담채
규격 : 18.7 x 15.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상좌는 본래 미천한 출신이었는데. 그림솜씨와 재능을 인정받아 중종(中宗)연간에.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으로 발탁되었다고 전해온다. 자(字)는 공우(公祐). 호(號)는 학포(學圃)이다. 그의 전칭작품 어가한면도는. 소나무와 잡목이 서있는 강안(江岸) 근처의 그늘아래. 배위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그와는 관계없이 돌아앉아 낮잠에 빠진 어옹(漁翁)을 표현한 소품(小品)이다. 한가로운 장면에 첨가해서 창공을 오르는 두 마리의 물새도 그려 넣었다. 이작품의 구도는 근경의 소나무와 멀리 산허리가 대각선으로 교차되어 x자형을 취하였다. 언덕의 소나무와 삼각형 잎의 수목묘법(樹木描法). 원산의 단면처리. 언덕의 주름. 인물표현에 이르기까지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와 마찬가지로 마원계(馬遠系)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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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상좌(李上佐)
아호 : 학포(學圃)
제목 :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
언제 : 15세기말~16세기전반
재료 : 족자비단에 담채
규격 : 82.3 x 190.6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상좌는 그림을 잘그려 자신의 신상에 영예를 얻었으며. 그것은 후손들에게 까지 화업(畵業)으로 계승되었다. 확실하게 그의 작품으로 현존하는 것이 없어 그의 회화세계의 윤곽을 파악하기 어렵다. 전해오는 기록으로는 산수. 인물을 잘 그렸다는데. 인물초상에 더욱 뛰어났던 듯하다. 공제(恭齊) 윤두서(尹斗緖)의 화평(畵評)에 의하면. 이상좌는 안견의 정수를 터득하였는데. 안견의 조밀하면서 시원한 조화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 이상좌의 전칭 산수화는 남송시대의 원체 화풍인 마원의 그림에 근사하다. 그 예가 여기에 소개한 <송하보월도>와 앞의 <어가한면도> 이다. 그 가운데 대작(大作)인 <송하보월도>가 널리 알려져 있고. 그것에 의해서 이상좌의 산수화풍이 이해되었다. 또한 그 작품의 양식을 통해서 조선시대 초기 화단에 파급된 남송 원체화풍을 설명하여 왔다. 바람이 부는 달밤의 정경을 담은 이그림은 보존상태가 좋지못한 편이다. 좌측에 경사가 급한 언덕비탈에 진한 먹으로 그려졌고. 그어두운 비탈에서 우측상단 대각선으로 자란 소나무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우측비탈 아래로 시동을 데리고 소나무의 기관(奇觀)을 응시하는 고사(高士)가 왜소하게 묘사되었다. 그 후경으로 낮게 원경산(遠景山)의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달은 화면의 맨꼭대기 약간 좌측에 동전만한 크기로 표현되었다. 가지가 꺾여 아래로 굴절된 소나무 묘법(描法)과 덩쿨표현. 언덕의 단면과 원산(遠山)의 간결한 처리. 인물묘사법등 전형적인 남송시대 마원류 의 화풍이다. 그래서 중국 그림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제기된 바가 있었다. 특히 소나무의 심하게 과장된 표현은 우리의 감성과는 거리가 있는데. 이상좌나 그 밖의 우리나라 화가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정서로 소화하지 않은 마원 화풍을 충실히 답습한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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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상좌(李上佐)
아호 : 학포(學圃)
제목 : 주유도(舟遊圖)
언제 : 16세기 중엽
재료 : 족자비단에 설채
규격 : 86.5 x 155 cm
소장 : 일본개인

해설 : 이 작품과 <월하방우도>가 쌍폭을 이루고. 모두 동일인의 필치임에는 틀림없으나 이상좌의 진작(眞作)이라는 근거는 없다. 특히 그는 <송하보월도>를 비롯해 남송대 마하파(馬夏派) 화풍의 대표격으로 믿어지고 있는데 그 화풍과 전혀 무관한 이 그림이 그이 작품으로 일본에서 전칭(傳稱)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연대적으로는 그의 전칭에 별 무리가 없다. 이 주유도는 근경(近景)에 쌍송(雙松)이 엇비껴 서있는 언덕과. 송음하(松陰下)에서 배를탄 채 낚시를 드리운 조사(釣士)를 묘사하고. 넓은 강 건너편의 후경(後景)에 산들과 토파(土坡)를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준법과 점묘법은 원대(元代) 성무(盛懋)의 화풍을 연상시켜 주지만. 그보다는 일본에서 활약했던 이수문(李秀文)의 화풍과 보다 관계가 깊어 보인다. 즉 이 작품의 배경에 보이는 산들과 이수문의 묵죽화에 보이는 언덕의 묘사를 비교하면. 가늘고 섬세한 일종의 피마준(披麻皴)과 호초점(胡椒點)이 놀랍도록 유사함을 알수 있다. 이 점은 이수문이 조선시대의 한국인이었음을 재확인 시켜주며. 또한 이작품의 화풍은 원대 남종화를 바탕으로 발전된. 조선 초기 회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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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장손(李長孫),최숙창(崔叔昌).서문보(徐文寶)
제목 : 산수도(山水圖)
언제 : 15세기 후반
재료 : 비단에 담채
규격 : 각각 60.1 x 39.6cm
소장 : 일본 야마도문화관

해설 : 이장손(李長孫), 최숙창(崔叔昌). 서문보(徐文寶)는 성종(成宗) 연간에 활동하였던 도화서(圖畵署)출신의 화가들이다. 그들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장손, 오신손(誤信孫). 진사산(秦四山). 김효남(金孝南). 최숙창. 석령(石齡) 등이 글래에 유명한데 그들의 화역(畵域)을 논할수 없다. 는 것이 있다. 또한 서문보가 선종 14년에 당시 도화서의 제조(提調)인 강희맹(姜希孟)의 천거로 9품의 체아직(遞兒職)에 올랐던 화원이었음은 <성종실록>에 게재되어 있는 기록을 통해 알수 있다. 작품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를 뿐 같은 소재에 비숫 한 구도법과 필세이다. 전경은 수면과 강안(江岸)의 풍경을, 후경은 안개가 짙게 깔린 원산의 모습을 담았는데 수평식 구도로 안배하였다. 이 작품들에서 특기할 사실은 안개위로 솟아 있는 산봉우리와 언덕의 표현에 미법산수(米法山水)를 구사한 점이다. 미점준(米點皴)은 중국 북송대의 선비화가 미불(米巿)과 그의 아들인 미우인(米友仁)에 의해서 즐겨 사용된 기법으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한 주요 양식이다. 그래서 여기의 여섯 그림은 15세기 후반 조선시대 초기 화단에 수용된 미법산수 즉 남종화의 한 지류를 밝혀 주는 중요한 회화사료(繪畵史料)이다. 그런데 이 그림들에 구사된 미법과 전체적인 화풍은 원(元)나라 초기 고극공(高克恭) 등의 형식화된 양식에 가깝다. 여기에 소개한 여섯점의 산수도는 필묵법과 담채가 능숙하며. 조선초기 산수화의 한 계보를 알려주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이장손(李長孫)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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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창(崔叔昌)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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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보(徐文寶)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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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수문(李秀文)
제목 : 묵죽(墨竹)10폭중 4폭
언제 : 15세기 후반
재료 : 화첩종이에 수묵
규격 : 각각30.4 x 44.5cm
소장 : 일본개인

해설 : 이 화첩은 모두 열 폭으로 되어 있으며. 여러가지 다른 상황이나 환경에 놓여 있는 다양한 모습의 대나무를 묘사하고 있다. 이 화첩이 발견됨으로서. 이 그림의 화가인 이수문이 조선시대의 한국인이 었음이 확실히 밝혀지게 되었다. 이수문은 일본에서 이주문(李周文)이라고도 불리어져. 상국사(相國寺)의 선승화가(禪僧畵家)로 1423년에 일본 사절단의 일원으로 내조(來朝)했다가 이듬해에 돌아간 슈우분과 그 이름이 같으나. 실은 별개의 인물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조선초기의 회화를 일본화단(畵壇)에 전하고 영향을 미치는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화첩의 끝 작품에는 영락갑진이십유이세차 어일본국래도북양사(永樂甲辰二十有二歲次 於日本國來渡北陽寫), 수문(秀文) 이라는 관기가 있어, 이수문이 1424년에 일본에 내도(來渡)한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관지의 해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수 있다. 즉 일본국에 내도 하여 북양에서 그리다. 라고 일본 학자들은 해석하고 있으나 이동주(李東柱) 박사는 일본국으로부터 북양에 내도하여 그리다. 로 읽고 있다. 전자와 같이 읽을 경우 북양은 일본에 있는 지명으로 볼수 있고. 또 이 그림의 제작도 일본 땅에서 이루어 졌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후자와 같이 해석 할 경우. 이 작품은 일본을 다녀온후 우리나라의 북양이라고 하는 어느 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볼수 있을 것이다. 문맥으로는 후자가 더 그럴 듯하나. 일본에서는 이수문이 일본에 정착하여 소오가파(曾我派)의 개조가 되었던 인물로 믿어지고 있어 그러한 사정과 잘 부합되지 않고 있다. 어쨌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관기는 이수문이 15세기 초에 활동했던 한국인이며.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 영향을 미쳤던 인물임을 분명히 해준다. 1424년에는 중국인은 누구도 일본에 입국할수 없었다는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화풍이 조선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화첩의 대나무들은 한결같이 줄기가 지극히 간늘고 반면에 잎은크고 길어서 중국의 묵죽과 큰 대조를 보인다. 또한 제1엽의 바위 묘사에는 곽희파의 영향이 감지되고 언덕의 표현 중에는 일종의 피마준(披麻皴)비슷한 준법이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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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수문(李秀文)
제목 : 향산구로도(香山九老圖) 6 첩한쌍
언제 : 15세기 후반
재료 : 종이에 수묵
규격 : 각각145.5 x 312.6cm
소장 : 일본 하라다 기념관

해설 : 향산구로도는 그냥 <구로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당(唐)의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그린것이다. 향산은 중국에 여러곳이 있으나, 백거이와 관련된산은.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懸) 용문산(龍門山)의 동쪽에 있다. 백거이는 이곳에 석루(石樓)를 짓고.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불렀으며. 세상사람들이 이산을 백향산(白香山)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백거이의 구로회 회원은. 호고(胡杲). 길민(吉旼). 정거(鄭據). 유진(劉眞). 노진(盧眞). 장혼(張渾). 적겸모(狄兼謨). 노정(盧貞). 백거이의 9명으로. 이들은 모두 연치가 높고 벼슬을 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백거이의 <구로도시서>에 의하면 회창(會昌) 5년 3월에 호. 길. 정. 유. 노. 장의 6현과 백거이가 모였었는데. 그해 여름에 적겸모 와 노정이 고향에 돌아와 이 모임에 참석했으므로 그 성씨와 연치를 쓰고 그 형모(形貌)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구로회>가 되고 또 이때 그린 그림을 <구로도> 라고 했다고 한다. 이수문이 그린 이 <향산구로도>도 바로 이러한 백거이의 구로회를 그린 것임은 물론이다. 6첩으로 되어있는 한쌍의 병풍을 함께 잇대어 놓고 보면. 좌우가 대칭을 이루도록 구도가 짜여져 있다. 각 병풍의 양쪽. 즉 첫번째 병풍의 제1폭과 둘째 병풍의 제6폭에. 각기 큰 나무를 배치하여 좌우대칭을 이루게 하면서. 그 사이의 산을 배경으로 한 공간에. 노인들과 따르는 시동들을 그려 넣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은 서로 담소하기도 하고 주변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자유로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기(氣)가 들어가 있고. 의습선(衣褶線)은 다소 투박하지만. 변화가 있으며 때때로 음영법(陰影法)의 구사가 엿보인다. 배경을 이루는 산들의 모습은. 이수문의 악양루도(岳陽樓圖)와 대단히 흡사하여.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작품일 것으로 믿어진다. 15세기 조선 초기의 인물화와 산수화의 잊혀진 한 부분을. 이 작품을 통해 되찾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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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수문(李秀文)
제목 : 악양루도((岳陽樓圖)
언제 : 15세기 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02.3 x 44.7cm
소장 : 일본 개인

해설 : 이수문은 묵죽만이 아니라 산수화. 인물화. 화조(花鳥)등도 그렸는데. 작품이 모두 일본에만 남아 있다. 이그림은 이수문이 난긴 산수화 중의 하나로. 중국 호남성(湖南省) 악양현성(岳陽懸城)의 서문루(西門樓)인. 악양루를 그린것이다. 악양루는 동정호(洞庭湖)를 정면에 두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등왕각(縢王閣)과 함께 자주 그려졌으며. 특히 당대(唐代)의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악양루에 올라 시를 지은후. 더욱 유명해 지기도 했다한다. 나지막하고 헐벗은 원경의 산을 배경으로, 중경에 악양루가 서 있고 근경에는 고목(枯木)과 무너져 내릴 듯한 초가지붕들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고목과 옥우법(屋宇法)은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회화에서 자주 볼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근경의 언덕 묘사에 보이는 일종의 피마준(披麻皴)처럼 보이는 가는선들은 묵죽화첩 중의 언덕묘사에도 공통적으로 엿보인다. 배경의 산들이 보여주는 형태나 그 묘사법은 매우 특이하다. 이 작품은 이수문의 <향산구로도>와 함께 조선 초기 산수화의 또다른 일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뜻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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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문청(文淸)
제목 :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언제 : 15세기 후반
재료 : 종이에 담채
규격 : 31.5 x 42.7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문청은 일본에서 분세이" 라고 불리어지며 이수문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건너가 활동한 조선초기의 화가로 믿어지며. 그는 교오도의 대덕사(大德寺)와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보아. 승려화가(僧侶畵家)가 아닐까 추측되며. 그는 산수와 함께 인물화에 뛰어났는데. 그의 작품들은 철저하게 한국적인 것들과. 일본적으로 변모된 것들로 대별된다. 일본에 있는 산수도 쌍폭(煙寺暮鐘)과 (洞庭秋月)은 이 누각산수도가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아마도 일본에 건너가기전에 그려진 작품들일 것으로 믿어진다. 이산수화들은 한결같이 안견파(安堅派) 화풍의 특징들을 보여준다. 규칙화된 산등성이 단선점준(短線點皴)으 시원형(始源形)으로 볼수있는 선묘(線描) 묵법과 수지법(樹枝法) 들뜬 점법(點法) 누각의 모습과 애매한 토대등이 한국적인 특성을 솔직히 드러내 보인다. 이 누각산수도는 그 구도가 한쪽 구석에 치우친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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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석경(石敬)
제목 : 운룡도(雲龍圖)
언제 : 15세기 중엽- 16세기 전반
재료 : 종이에 담채
규격 : 24.9 x 19.7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석경은 안견(安堅)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인물과 묵죽. 그리고 산수를 잘 그렸다. 대담한 발묵법(潑墨法)으로 처리한 운무를 배경으로. 여의주를 거머쥐고 조화를 부리는 뿔이난 규룡(叫龍)을 그린 운룡도(雲龍圖)는. 출렁이는 물결 묘사와 어울려. 세찬 기세를 보여준다. 청(靑) 색조의 담채로 바탕을 처리한 데 비해 눈. 코. 입 등에만 주홍의 액선트를 가한 점이라든지. 농묵 의 점을 찍어 눈동자를 마무리한 수법은 매우 돋보인다. 대체로 용은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게 하는 조화를 부린다 하여. 가뭄 때에는 용그림을 그려 놓고.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들은 주로 공필법(工筆法)으로 그려졌으리라 추측되며. 발묵 위주의 운룡도는 선종과 관련하여 남송이래로 많이 그려진 듯하다.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실려 있는 송대 진용(陳容)의 <구룡도>에서 이러한 유형을 찾아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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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령산 / 피리독주

출처 : 별따라 구름따라
글쓴이 : 체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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